지상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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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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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본문 : 마태복음 5장 6절

설교 :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본문의 말씀은 산상보훈 중 넷째 되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첫째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축복, 둘째는 애통하는 자의 축복, 셋째는 온유한 자의 축복입니다.

오늘은 넷째 되는 축복 즉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의 축복입니다.


주림과 목마름은 인간의 가장 절실하고 기본적인 욕구들입니다.

주림에는 먹을 것으로, 목마름에는 마실 것으로 해결합니다.

이 음식과 음료수는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입니다.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먹을 것과 마실 것은 귀하지만 특별히 예수님 당시에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가난으로 찌들린 유대인들에게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은 대단히 중요했고 또 이것처럼 절실한 요구는 없습니다.

그들에게 마실 것을 제공하는 우물과 먹을 것을 제공하는 밭은 그들에게는 하나의 생명과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자 그들은 자기들에게 먹을 것을 해결하여 주시는 예수님을 데려다 자기들의 왕을 삼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에 대하여 말씀하셨을 때 주님과 목마름을 절실하게 느낀 당시의 사람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실감있게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님과 목마름의 대상을 바꾸어 말했습니다.

그것은 먹을 것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이 아니라 의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입니다.

이 의는 정의를 외치는 어떤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구속 받은 하나님의 백성과 모든 사람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입니다.

우리 육체의 생명이 먹을 것과 마실 것에 의존한다면 영적 생명은 의를 사모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것에 따라 육체가 변화 되듯이 우리의 영혼도 무엇을 먹고 마시느냐에 따라 영혼의 상태가 결정됩니다.

우리가 겉사람은 음식과 음료를 요구하지만 속사람은 의를 요구합니다.


그러면 이 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먼저 의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성경에서는 의를 하나님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즉 의로우신 하나님의 속성을 말합니다.

우리가 의를 사모한다는 것,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필요하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의의 기준은 애매모호합니다.

이쪽에서는 의인 것이 저쪽에서는 얼마든지 의가 아닐 수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의가 안 되는 것이 미국에서는 의가 됩니다.

미국에서는 주마다 법이 달라서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죄가 안 되는 것이 애리조나주에 가면 죄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의의 기준은 서로 달라도 하나님의 의의 기준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바로 의이고 모든 의는 하나님으로 부터 출발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이 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기준이고 표준이란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 지배 원리가 하나님의 의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나의 자로 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로 재어야 합니다.

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우리가 구약 성경을 읽다 보면 간혹 구약의 사건들을 보고 당황해 합니다.

가령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거기에 있는 사람 중 한 사람도 남기지 말고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우리가 이 때 사랑의 하나님이 “정말 이럴 수가 있는가?”하면서 회의를 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의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이라고 했으면 죽이는 것이 의입니다.

우리는 절대적인 의를 선언할 입장에 서 있지 못합니다.

절대적인 의는 오직 하나님 자신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한다는 것은 의의 근원이며 본질이신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필요하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은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이는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그의 주림과 목마름을 채워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갈망할 때 성경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의는 올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의에 대하여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싶어 합니다.

죄인인 우리가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우리는 불의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요구하는 사람마다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내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도움으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때 우리는 의롭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때 이 의는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그저 주신 전가된 의입니다.

우리는 의롭지도 않고 의로와 질 수도 없습니다.

나의 도적적 결단이나 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날 위해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흘린 예수님을 믿었더니 성경은 “의롭다"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그 때부터 우리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삶은 시작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주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은혜의 선언을 받은 후에는 우리의 마음속에 의에 대한 열망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가 의롭게 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여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의롭지도 않고 의로와 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은혜로 의롭다고 하십니다.

내가 의롭다고 인정 받는 것은 하나님께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이런 선물을 받아서 감격에 넘치는 사람은 정말 자격을 갖춘 사람이 되기를 갈망합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의롭다 인정함을 받은 사람은 정말 “의롭게 살고 싶어 몸부림 칩니다"

악한 사람도 천국을 사모합니다.

그러나 의는 오직 의인만이 사모할 수 있습니다.

악한 사람은 의를 사모하지 않습니다.


영국의 대 설교자인 스펄전 목사님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의인, 이 사람은 하늘이 없다해도 의를 사모할 것인요, 또 이 사람은 지옥이 없다해도 불의를 증오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구원 받은 성도가 얼마나 뜨겁게 의를 사모해야 하는 가를 보여 줍니다.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그의 마음 속에 거룩함에 대한 소원이 생깁니다.

그가 아직까지 죄를 짓고는 있지만 그의 죄를 끊기를 간절히 갈망합니다.

아직도 그가 가지고 있는 나쁜 습관과 버릇을 고치기를 원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악한 말이나 행동에 대하여 괴로와 합니다.

이러한 기도와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해 갑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런 사람에게 주님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 의는 어떻게 해서 얻을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이 의를 얻기 위해서 금욕주의적인 생활을 합니다.

그들은 자기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욕망을 억제하기 위하여 스스로 고행하며 금식합니다.

미션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동생을 죽이고 괴로워 합니다.

그는 제트 예수교 신부를 만나 고행을 시작합니다.

자기가 사용하는 갑옷, 칼을 묶어 커다란 짐을 만들어 그것을 끌고 높은 산에 올라갑니다.

어떤 때는 폭포 속을 기어서 올라가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의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의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죠?

하나님의 의는 금욕적인 생활로 얻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다른 것으로 대치하여 얻으려고 합니다.

인간 영혼의 주림과 목마름은 하나님께 대한 것인데 이것을 다른 것으로 충족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곳에서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대신에 다른 곳에서 의에 대한 만족을 얻으려고 하면 그것은 우상이 됩니다.

돈에서 만족을 얻으려고 돈에 대하여 혈안이 되어 돌아 다니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 돈이 우상이 되어 버립니다.

사랑에 대하여 갈급하여 이성에 대한 사랑을 찾은 사람은 사랑이 우상이 됩니다.

지식에 대하여 갈급하면 지식이 우상이 됩니다.  

지위 권세도, 명예도 이 의에 대한 만족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수가성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나눈 대화를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 여인은 인생의 쾌락과 만족을 얻기 위하여 남편을 다섯번이나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여자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세상에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통해서 마음 속에 있는 꺼질 줄 모르는 주림과 목마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내주하시기 전에는 이 주림과 목마름에 대한 해결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외형적인 경건주의로 이 의를 추구합니다.

즉 그들은 예배에 참석한다든지 헌금을 드리고 구제하는 종교 의식으로 의로와 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행위로서 의로와 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정확하게 바치고 안식일을 철두철미하게 지켰습니다.

그들은 성전에 나가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그런 종교적인 공로를 보고 그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너희 죄가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의를 얻을 수 있습니까?

산상수훈의 팔복의 순서가 여기에 대한 답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심령이 가난한 자'로부터 출발합니다.

가난한 마음은 하나님의 안목으로 자신을 볼 때에야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볼 때 우리가 죄인임을 발견합니다.

있어야 할 것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없어야 할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자기 자신을 보고 애통하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자신을 깨닫고 주님께 맡깁니다.

우리가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릴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훈련시킵니다.

그 때 우리는 온유한 사람이 됩니다.

이런 사람만이 비로소 하나님의 의를 사모합니다.

이 순서는 절대로 생략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영적인 불안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도 아직 마음에 평안이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가 왜 우리를 끈질기게 붙잡고 있습니까?

우리 속에 있어야 할 이 하나님의 의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 우리는 애통해 합니다.

그리고 의를 사모합니다.

이 의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몸부림 치면서 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정말로 주리고 목말라 보세요.

무엇이든 못할 것이 없습니다.

6.25 때 피난길에서는 굶주림 때문에 씹을 것이 있다면 아무 칙뿌리든, 나무 껍질이든, 풀이든 아무거나 다 먹었습니다.

그 갈망입니다.

아프리카에는 가뭄과 기근 때문에 먹을 것이 없어서 자기 아이들까지 잡아 먹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허기에 져 있으면 자기 자식까지 먹습니까?

먹는 것에 대한 애타는 갈망입니다.


저는 굶주림에 대한 갈망은 그렇게 심하게 느껴 보지는 못했지만 군에 있을 때 무장 간첩이 나타나 17일동안 간첩을 잡으려고 산속을 헤맨 적이 있습니다.

이 때가 7월 달이었는데 얼마나 더웠던지 땀을 흘리고 현기증이 나고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물만 퍼 마시는데 웅덩이 물이 고여서 물은 다 썩어 냄새나고 벌레가 득실거리는 물도 먹어 보고 논두렁에 흐르는 물도 먹어 보았습니다.

주림과 목마름을 절실하게 느끼면 양식과 물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다 합니다.

성경은 그렇게 의를 사모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게 주님을 사모해 보셨습니까?

교회를 관람하듯 왔다가 돌아가는 사람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영혼이 갈급하게 하나님을 사모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와 같이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하나님 곧 생종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이다"하면서 주님께 나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찾는 방편은 두가지인데 말씀과 기도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속에서 자신을 보여 주시고 기도할 때 만나 줍니다.

말씀을 알고 싶어하는 욕망과 이 말씀이 삶속에 채워지기를 열망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는 발견됩니다.

이처럼 주리고 목말라 하며 고통스러운 정도로 주님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은 “복이 있도다 너희가 배부를 것입니요"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배부를 것임이요"라는 것은 무엇데 배부른 다는 것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으로 충만하여 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성령으로 충만해 지면 다소 부족한 것이 있어도 만족합니다.

불편한 것이 있고 인간적인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도 만족해 합니다.

불만이 없습니다.

우리는 시 23편 1절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우리는 영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만사가 잘 되어도 짜증이 납니다.

우리의 방황은 배고파서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만족을 얻지 못해서 방활합니다.

영적인 갈급함 때문에 이 교회, 저 교회, 이 기도원, 저 기도원을 기웃거리고 유튜브를 통해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를 듣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강해 설교자인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조그만 배고프면 돼지 우리를 찾지만 정말 배고프면 아버지를 찾는다"

탕자의 모습을 보세요,

탕자가 조금 배고플 땐 돼지 먹는 쥐엄 열매를 찾지만 정말 배고프자 아버지 집을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조그만 배고픔이나 욕망은 쥐엄 열매로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해 보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속에 우리의 영혼 속에 있는 의에 대한 절실한 욕구는 우리의 어떠한 노력이나 방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는 거지의 모습 그대로 아버지 앞으로 돌아 옵니다.

그제야 비로소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뿐만 아니라 마음과 정신의 안정까지도 얻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걱정과 욕망으로부터 진정으로 해방되고 싶습니까?

하나님 앞으로 나아 오십시요,

억제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잊으려고 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으로 채워 질 때에만이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향하여 계속해서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인하여 배부르며 더욱 주님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그 분만이 우리 생명의 해답을 주십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 그 곳에 하나님으로 채워집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이 임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내 영혼을 붙들고 하나님과 거룩한 교제가 이루어 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충만한 그 순간 우리는 “주님, 부족함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생명의 환희와 감격속에서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의에 대하여 주리고 목말라 하는 이 열망과 우리를 배부르게 채워주는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평생동안 주님을 섬기며 우리의 삶이 말 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환희로 채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엘림교회

Penn Elim Presbyterian Church

703 Pen Ambler Rd., Ambler, PA 19002

215-939-8470

주일 예배 : 오전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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