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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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흠] 너희는 세상의 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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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너희는 세상의 소금

본문 : 마태복음 5장 13절

설교 :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저의 가족은 예전에 아파트에 살았습니다.

아파트는 좁은 공간에 여러 세대가 같이 살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나 성격들을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네는 어떻게 살고 누구 성격은 어떻다는 것이 짝 퍼집니다.

얼마 전에 저의 형수님이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도련님! 우리 아파트에 예수 믿는 사람은 다 남들로 부터 욕 먹고 있어요. 그리고 욕 먹는 사람을 보면 다 예수 믿는 사람들예요"

이 말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우리는 가끔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예수 믿는 사람들은 더 지독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 나쁘더라"라는 말을 듣습니다.

저는 이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그것은 믿지 않는 사람이 믿는 사람을 헐뜯기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일축해 버립니다.

혹은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 간혹 그런 사람이 있지만 불신자들은 예수 믿는 사람을 주목해 보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이 잘못한 것이 더 드러나서 그렇게 보여질 뿐이지 믿는 사람들이 더 훨씬 선량하고 착하다는 생각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과연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 착한가?” 

“예수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모범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가?”

심각한 고민 끝에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더 좋지도 않다"

이 결론은 저에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 나쁘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믿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른 것이 없다면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삶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면 주일날 교회에서 설교때마다 외치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의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해 주는 교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의 명언집"으로 “하나의 고전책"밖에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지 않고 나의 신앙과 삶에 표준이 되지 못한다면 이 성경 말씀은 마귀가 그렇게도 없애 버리기를 원했던 구시대의 산물로 전략해 버리거나 하나의 명작이나 소설책에 불과 합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더 이상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 되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산상수훈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절실하게 들려 집니다.

삶속에 말씀이 침투하지 못하고 내가 이 말씀을 붙잡고 “어떻게 세상에서 생활해 나갈까?”하는 몸부림 치는 안타까움과 고통이 없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산상수훈의 예수님의 말씀은 그래도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우리의 신앙 양심을 찌릅니다.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의 산상수훈의 예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보세요.

이 말씀들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집니다.


첫부분은 5장 1절부터 12절까지 입니다.

여기서는 기독교인의 성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어떤 사람인가?”


그리고 13절부터는 한걸은 더 나아가 주님이 말씀하신 바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그의 사람됨을 어떻게 나나태어야 하는가?”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았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로 알아서 주님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되기를 요구하는 바로 그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서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기 위해서 산상보훈에 나타난 의미, 교훈, 우리의 삶속에서의 적용 그리고 신학적인 문제까지 살펴 보려고 합니다.

내용이 거의 비슷비슷한 것 같지만 각 구절마다 독특하고 새로운 면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만 합니까?”

그리스도인들 각자에게 부딪치는 삶의 현장인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만 합니까?

그리스도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는 잘못된 현상이 있습니다.


하나는 도피주의 입니다.

세상이 살아가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도피도 하지만 그것보다도 세상이 더럽기 때문에 그것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 도피하는 것입니다.

요새는 별로 이렇게 살아 가는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끔 있습니다.

사회가 혼란해 지고 우리 주위에서 죄악된 모습들이 많이 나타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요새같이 시국이 어수선하고 보이는 것보다 불의와 죄악의 모습일 때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야, 세상이 너무 더럽고 추하구나 내기 이런 세상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는 조용히 산속의 기도원에나 들어가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살다가 천국에나 가야지. 나의 고향은 저 하늘나라이고 나의 시민권은 저 하나님 나라에 있는 걸"

불의한 사회를 떠나 죄악이 물들지 않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그대로 남아 있는 산속 깊은 곳이나 수도원으로 들어 갑니다.

전도관이 그랬습니다.

충청도 계룡산에 가면 간혹 그런 사람들이 한 집단을 형성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신자들의 마음속에도 은연중에 이런 생각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결코 도피주의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세상을 떠나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 불법과 불의가 성행하고 이 세상이 아무리 더럽고 추해서 소돔과 고모라 같을지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도피해서 내세에만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은둔주의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세속주의 입니다.

세상이 하도 재미있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 속에 빠져 버립니다.

오늘날 얼마나 우리 눈을 유혹하고 우리 마음을 빼앗아 가는 것이 많습니까?

시내에 나가면 온통 재미있고 즐기기 위한 것들뿐입니다.

특히 오늘날은 경쟁의 시대이기 때문에 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남들이 하는 것을 뭐든지 다 해야 합니다.

조금만 정직하게 조금만 법대로 할려고 하면 남에게 뒤떨어지고 결국에는 낙오자가 되어 버립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남들이 하는대로 적당하게 속여야 하고 출세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짓밟고 일어서야 하고 공부 잘하기 위해서는 적당하게 컨닝도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따돌림 당하지 않고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 남들이 하는대로 세상과 타협하며 적당적당하게 살아 갑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이왕이면 꿩먹고 알먹는다고"

세상에서도 출세하고 잘 살고, 하늘나라에 가서도 행복하게 살고.  누이좋고 매부 좋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집마다 대문에는 교회 문패가 붙어 있고 한국에 기독교인이 천만이라고 하지만 삶의 현장속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어디 붙어 있는 지 눈을 부릅뜨고 찾아 보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이 목사님이 선교부로부터 받은 돈을 교회마다 나누워 주러 시골 교회를 찾아 다녔습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여관에 들 때도 있었습니다.

하루도 여관에 들었는데 마침 독방이 없어서 어떤 사람과 같이 합속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보니 꼭 그 관상이 ‘도둑놈 상'이라, 시골개척 교회에 보조해 주는 그 헌금을 훔쳐갈까 봐 겁이 났습니다.

그런데 먼저 있는 사람도 이 목사님을 보니 도둑놈상이라 이 사람도 “혹시 저 사람이 밤에 내 돈을 훔쳐 갈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돈 훔쳐 갈까 봐 목사님은 방 이 편에 누워서 잠을 자기 못하고 자기가 깨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에헴' ‘에헴' 합니다.

상대편의 사람도 방 저편에 누워서 자기도 안자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계속해서 몸을 뒤적거리며 부스락 거립니다.

두 사람이 밤새도록 ‘에헴' ‘부시락' ‘에헴' ‘부시락'거리며 잠을 한 잠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서 밥상이 들어 왔는데 겸상이라 둘이서 같이 식사를 합니다.

이 때 목사님이 식사 기도를 하고 밥을 먹으려고 하니까 상대방의 사람이 묻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예수를 믿습니까?”  “에, 나는 목사입니다"

그러자 상대방은 깜짝 놀라면서 “에 저는 아무 교회 장로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서로 몰라서 상대방을 도둑으로 오인하고 ‘에헴' ‘부스럭' 거렸습니다.

우리의 모습속에서 이런 일들은 없습니까?

한 직장에서 수년동안 같이 있어도 상대방이 예수 믿는 사람인 줄 모릅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기회에 우연한 일로 그가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압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모습을 보니까 도무지 믿는 사람의 모습 같이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 속에 ‘푹 박혀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적당히 술 담배하면서 적당히 거짓말하면서 살아 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속주의를 거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마다 세속적이 되고 교회마저 세속화가 될 때 이 사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사회가 부패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가닥 남은 양심은 우리 그리스도인이고 한줄기 남은 불빛은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속주의를 배격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은둔주의도 거부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아 가되 세상에 속해 살아가지 않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개혁시키며 세상의 죄악을 막고 사회를 정화시키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셨다면 이 세상이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장소입니다.

여기에 뜻이 있어서 나를 이 자리에 보내시고 지금 이 상황에 처하게 하신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내가 이 어두운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지 않고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우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교훈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죄를 범하지 않으면서 다시 말하면 세속화를 거부하면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소금과 빛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그 말들의 의미를 이해하면 능히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요.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말씀은 세상의 부패를 전제하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이미 부패하다는 뜻입니다.

소금이 필요한 곳은 부패가 있는 곳, 부패의 가능성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소금을 요구합니다.

많은 인본주의자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낙관주의를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지식과 과학의 발달로 인해 오늘보다는 내일이, 내일 보다는 모레가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교육을 받아 사고의 능력이 발달되면 음주의 문제나 부도덕의 문제나 사회 악의 문제가 해결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점점 더 선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은 세상의 왕인 사탄의 지배하에 들어가서 점점 약해져 가고 있다는 이 세상의 악의 현실성을 우리는 눈을 뜨고 똑바로 바라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을 ‘피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은 ‘소금은 나를 요구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 있어서 필요 불가결의 존재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야말로 이 사회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소금과 같은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예수님은 분명히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이것을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소금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깊은 각오와 결심을 가져야 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중대한 사명을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소금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소금은 무엇보다 썩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세상을 향한 소금의 역할은 거대한 일이 아닙니다.

소금은 생명을 만들어 내거나 창조하는 일들을 하지 못합니다.

단지 살아 있는 생명들이 죽지 않도록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소금의 주된 기능은 보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대한 일은 아니지만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마치 소금에 생선을 절이면 생선의 부패를 막는 것과 같습니다.

소금으로 절여진 생선은 부패시키는 균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부패의 과정을 일단 정지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부패를 정지시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죄로 인해 부패의 과정에 있습니다.

이 부패의 과정에 있는 세상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소금의 역할을 함으로써 부패를 정지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부패가 기독교인들이 존재함으로 말미암아 정지되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됩니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면 그렇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답게 살면 그렇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답게 살면 그의 성품과 특징으로 사회악과 부패를 막을 수 있습니다.

그의 가정에서 , 그의 사무실에서 그가 가는 곳 어디에서나 그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이 인정받을 때 부패는 멈추게 됩니다.

악이 있는 곳에 그가 나타나므로써 악이 그 이상 퍼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방안에서 추잡한 이야기를 하다가도 세상의 소금인 그리스도인들이 그 방안에 들어가면 추잡한 이야기가 자연적으로 멈추어 집니다.

두 사람이 싸우다가도 세상의 소금인 우리 그리스도인이 다가서면 두 사람의 싸움이 멈추어 집니다.

이런 일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사실이 표증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소위 그리스도인들이 부패해 있다는 기정 사실을 우리는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 땅에 최후의 진실한 그리스도인들까지 사라져 버린다면, 한번 그런 사회를 상상해 보신 일이 있습니까?

복음의 빛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그런 역사를 상상해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그리스도 없는 문명, 그리스도인이 없는 사회, 복음의 없는 역사를 상상해 보세요.

사회가 정말 암담할 것입니다.  희망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도들로 하여금 이 부패한 문명과 사회와 역사속에서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강조해 주고 계십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믿을만한 사람, 그 인격이 진실하고 하나님을 향한 자세에 있어서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가리켜서 ‘소금 같은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그들이 약속을 했을 때에는 그 약속이 변하지 않는 약속이 되기를 원하면서 이런 약속을 가르켜서 ‘소금언약'이라고 말했습니다.

신실한 약속, 변함이 없는 약속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들.

주님께서는 이 시대에 이런 소금과 같은 존재를 얼마나 요구하고 계십니까?

소돔과 고모라 같이 점점 변해 가는 오늘날의 우리 사회를 향해 주님께서 소금과 같은 의인 10명을 찾고 있습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 10명만 있다면 내가 이성을 멸하지 아니하리라. 

왜냐하면 그들이 사회가 썩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에.


두번째로 소금이 하는 역할이 무엇입니까?

소금을 맛을 내는데 사용합니다.

음식에 소금이 들어가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리 산해진미가 있다 하더라도 그 속에 소금이 없다고 한다면 그 음식은 맛을 내지 못합니다.

소금이 들어가야 음식이 맛이 납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도 철학이 있고, 문학이 있고, 과학이 있고, 예술이 있고, 모든 문화가 있고 모든 부귀 행복이 있다고 할지라도 여기에 소금과 같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없으면 이 곳에 참된 행복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생애는 살맛이 없는 생애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없는 사회는 제기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얼마만큼 맛을 내고 있습니까?


미국의 헨델 홈즈하는 유명한 그리스도인이 한사람 있았는데 그는 설교를 매우 잘했습니다.

누가 보기에도 말씀을 전하는 은사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성직자가 되기를 거부했습니다.

친구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가진 훌륭한 자질과 은사를 가지고 왜 말씀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헨델 홈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일 내가 믿고 있는 성직자들이 장의사처럼 행동하지만 않았었더라면 나는 벌써 성직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장의사처럼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 우리 중에는 없습니까?

도무지 활기를 찾아 볼 수 없는 그리스도인,  생기가 없는 그리스도인들, 매력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주변에는 없습니까?


‘인형의 집'이라는 소설을 쓴 입센은 그리스도인들을 이렇게 고발했습니다.

“그대들은 그리스도들을 면밀히 살펴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움푹한 눈, 창백한 얼굴, 미소가 사라져 버린 어두운 얼굴, 

숙여진 힘없는 머리  태양이 그들을 비추고 있으나 태양을 잃은 사람들.

내가 왜 크리스찬이 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불신자들이 우리를 보면서 그렇게 진단하지는 않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매력을 던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능멸과 조롱을 주고 있습니까?


요새 신문을 읽을 때마다 참 부끄럽습니다.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보면 다 기독교인들입니다.

범양 그룹, 박회장도 교회 집사고 한사장도 교인이죠 

박종철군 고문 사건의 주역 조경위도 기독교인이죠.

부천 성고문 사건의 주범 문형사도 기독교인이죠.

젊은 학생들과 뜻깊은 사람들이 이 땅에 민주화가 이루어지기 위해 정의를 위해 싸우다가 피를 흘리고 감옥에 들어 가는데 목사님들은 그 좋은 63층 스카이 라운지에서 조찬기도회 라는 명목으로 모여 국가와 민족을 위한 기도가 아닌, 불의와 불법이 가득한 반민주적인 정권 연장을 위한 기도를 해 주고, 장로님들이 이에 말 맟추어 그것을 옹호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있습니다.

요새 학생들의 입에서 심심차게 오르 내리고 있는 말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화염병을 던져 불태워 버려야 할 곳은 교회이다"

가장 먼저 화염병을 던져야 할 곳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우리 장로교회가 그 표적이 되고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까?


작년 86년도 비공식인 통계에 의하면 카톨릭 신자는 20%가 늘어난 반면에 우리 개신교 신자는 오히려 줄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카톨릭 성직자는 신뢰하지만 개신교 성직자는 신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습게 여깁니다.

한국 통계 조사 기관인 갤럽 에서 최근에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당신이 만약 종교를 택한다면 어느 종교를 택할 것인가?”하고 조사한 바에 의하면,

불교를 선택하겠다 33%, 천주교 32%, 기독교 13% 입니다.

불교는 전통 종교이니 친밀감을 갖고, 천주교는 사회 정의를 위해 애써서 호감을 갖는데 기독교는 정부에 알랑거긴다는 것이죠.

대학생들이 기독교에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까?

소금이 제 맛을 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금이 제대로의 맛을 내기 위해서는 음식 속에 들어가서 그 자신이 녹아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녹지 않은 그리스도인들, 녹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우리들.

이것이 문제입니다.


자기 자신은 절대로 녹아지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자기 이름, 자기 견해, 자기 주장, 자기 고집 속에 꽁꽁 묶여 있습니다.

그러나 소금은 음식 속에 들어가서 푹 녹아 버려야 됩니다.

소금은 설탕이 아닙니다. 단맛이 아닙니다.

소금은 삼키기 힘들고 입에 닿으면 뺃아 버리고 싶은 짠맛입니다.

그러나 이 소금이 음식속에 들어가서 푹 녹으면 단맛, 쓴맛, 신맛 등 온갖 유형의 맛들과 어울려서 독특한 새로운 맛을 창조해 냅니다.

우리가 녹지 않으면 사회가 변화되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에 기독교인인 정치가가 없어서 정치가 혼란합니까?  아닙니다.

대통령도 교회 다닌 사람이었고 제 1당 총재도 장로임이고 국회 부회장도 목사님입니다.

국회 의원 중에 1/3이 기독교인이고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 나라 국회 의사당에는 예배실이 있습니다.  그래도 국회에서는 매일 싸우기만 합니다.

기독교인 정치가가 없어서 정치가 혼란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 실업가가 없어서 종업원들이 혹사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소금의 제 맛을 내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역사가 한 말을 마음에 깊이 기억하여야 합니다.

“6.25의 새벽에 군인들만 잠들어 있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새벽에 이 나라 정치인들만 잠들어 있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6.25 새벽에 가장 깊은 잠을 자고 있었던 곳은 한국의 교회들입니다"


6.25사변 직전이 한국 교회사에 가장 어두운 때였습니다.

당시 교회마다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연합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의 싸움으로 한국 교회치고 붕괴와 분열을 겪지 않는 교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싸움의 요란스런 함성속에서 부패한 어둠의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6.25의 비극은 한국 교회의 비극이고 이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책임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의인 열명을 찾지 못하셨던 하나님은 그 도성에 멸망의 심판을 작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오늘 똑같은 안목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의 현장을 주목하십니다.

“너희 중에 참으로 의인 열명이 있느냐?”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진정으로 자신을 녹여서 맛을 내는 소금이 있습니까?


사회가 녹아지기를 기대하지 말고 나 자신이 먼저 녹아집니다.

사회가 먼저 변화되기를 바라지 말고 나 자신이 먼저 변화됩시다.

그러면 사회는 저절로 녹아지고 변화됩니다.

소금이 녹아지면 물속에서 맛을 내는 것처럼.


우리 주님은 “너희는 녹아 맛을 내는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소금은 지극히 평범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극히 귀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도 지극히  평범한 것입니다.

평범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누구나 다 사는 것처럼 인생을 평범하게 사세요.

그러면서도 그 삶은 지극히 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없는 사람들이 내 삶을 관찰할 때 나에게서 도무지 부인할 수 없는 어떠한 매력이, 어떠한 향기가. 아름다움이, 삶의 독특한 맛이 내 삶의 질을 형성하고 있어야 합니다.

“야, 저 사람 속에 뭔가가 있구나?” 

어떻게 이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 답게 살면 됩니다.

여기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미 소금이 되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이미 이 세상의 소금인 것입니다.

내가 이미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부패를 방지하고 맛을 내며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던지고 있습니다.

내가 그들 속에 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이 은혜를 받습니다.

“야, 저 사람속에는 뭔가가 있구나!”

저의 친구중에는 “얼굴만 쳐다 봐도 은혜를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의 직장에서 불신자들의 모임속에 신자인 내가 등장할 때 사람들이 어떠한 반응을 보입니까?

모든 부패한 행동과 부패한 대화가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나 때문에 그 부패한 환경이 억제되는 그런 아름다움이 우리의 생활속에 나타나고 있습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으로 중생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내 도덕적 형편과 내 신앙의 상태가 어떠한 자리에 놓여 있든지 간에 이미 우리는 소금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나는 얼마만큼 더 소금다운 소금인가?”

“나는 어떠한 종류의 그리스도인인가?”

“나는 맛을 발하는 그리스도인인가? 맛을 잃어 버린 그리스도인가?”

이것만이 문제가 됩니다.

맛을 잃어 버린다면 그 소금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와는 다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같은 죄라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 사회에서 더 큰 희롱과 모욕을 받습니다.

특별히 신문지상에서도 더 떠듭니다.

맛 잃은 소금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한국 교회가 얼마나 많은 훼방을 받습니까?

맛 잃은 소금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그리스도인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복음이 얼마나 많이 막힙니까?


소금이 맛을 잃는 것은 갑자기 잃는 것이 아닙니다.

점점 잃어 갑니다.  기도가 게을러 집니다.

주일날 예배당 출석이 게을러 집니다. 혹은 자기가 맡은 바 책임을 점점 잘 하지 않습니다.

점점 세상과는 가까워지고 교회와 멀어집니다.

마지막에 맛을 잃고 맙니다.

그래서 맛을 잃지 않기 위해서 조심하라고 예수님께서 경고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소금으로써 세상이 바로 부패해져서 갈찌라도 내가 있으므로 그것을 막고 나 스스로 녹이므로 세상 사람들에게 맛을 주는 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보잘 것 없는 이 모습들을 보고 그들이 기쁨을 누리며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귀한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축복이 우리의 삶에 충만해서 ‘소금다운 소금' ‘부패를 막는 소금' ‘자신을 녹이는 소금'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사는 우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3절)


엘림교회

Penn Elim Presbyterian Church

703 Pen Ambler Rd., Ambler, PA 19002

215-939-8470

주일 예배 : 오전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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