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흠] 디나 사건을 통한 시므온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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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디나 사건을 통한 시므온의 비극
본문 : 창세기 34장 1-7절, 24-27절
설교 :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크리스천 헤럴드에 보니까 한가지 우스께스러운 유모오가 실렸습니다.
어떤 욕심쟁이 성도가 외나무 다리를 조심조심 건너가고 있는데 갑자기 돌풍이 불어 왔습니다.
겁에 질린 그는 “하나님!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시면 저의 재산 전부를 바치겠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의 간구의 응답인지 다행히 바람은 멎었고 그는 무사히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왜 내가 전 재산을 바치겠다고 그랬을까 반만 바친다고 할 껄”하고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까 전부 바치겠다고 한 말은 취소구요. 반만 바치겠습니다”
그랬더니 돌풍이 다시 불어 닥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아, 하나님! 농담도 못합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삶속에 이같은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는 어려울때 생각과 평안할 때 생각이 다릅니다.
우리 속담에 어디 들어 갈 때와 나갈 때의 생각이 다르다고 말합니까?
낮은 자리에 있을 때와 높은 자리에 있을 때가 다릅니다.
부탁 받을 때와 부탁할 때가 다릅니다.
어려운 일만 당하면 “하나님! 이 문제만 해결해 주시면 제가 이러 이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맹세합니다.
그러다가 그 문제가 해결되고 고통이 지나면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나님과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 버립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34장에 나타난 야곱 가정의 비극의 사건 배후에는 이런 바탕이 깔려 있습니다.
아마 우리는 기억하고 있을 줄 압니다.
야곱이 아버지를 속여 가며 그의 형 에서의 축복을 다 가로채서 형을 피해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다가 벧엘이라는 곳에서 돌베게를 베고 자다가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는 그 곳에서 하나님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할 것이라”는 축복의 선언을 듣습니다.
그러자 야곱이 뭐라고 선언합니까?
‘나로 평안히 돌아오게 하면 하나님만 섬기고 십일조를 드리고 여기에다 하나님의 전을 짓겠습니다”
야곱은 이런 약속을 했습니다.
이제 야곱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평안히 고향으로 돌아 왔습니다.
홀연단신으로 목숨만 살기 위해 빈손으로 도망 갔는데 이제는 심히 큰 거부가 되어 아내들과 12명의 아들들과 수만은 종들과 짐승들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더구나 자기를 죽이려는 형과의 문제도 잘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면 야곱이 어떻게 해야만 합니까?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켜 벧엘로 가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전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그가 어디로 갔습니까?
창 33장 17절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은고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하나님을 위한 집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집입니다.
지금 야곱이 어디로 가야 합니까?
벧엘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갔습니까? 숙곳이라는 곳에 가서 그 곳에 정착하려고 집을 짓기 시작합니다.
분명히 야곱은 벧엘로 가야만 하는데 여기가 살기 좋아서 그냥 여기에다 집짓고 편안하게 살고 싶은 지극히 인간적인 본능에 따라 행동합니다.
그는 점점 이 세상을 즐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서서히 하나님을 향한 서원과 결심에서 멀어져 갑니다.
분명히 야곱은 얍복 나루터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한계도 알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은혜받고 변화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시 후퇴하기 시작하는 야곱의 모습을 보세요.
이 약해진 야곱의 모습을 보세요.
그는 벧엘로 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그의 세상적인 편리를 즐기면서 하나님을 서서히 잊어 버려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도 나약하고 은혜도 모르는 야곱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비단 야곱만의 일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이 야곱의 모습은 오늘 나의 모습입니다.
야곱은 바로 나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너무 많이 받았고 지금까지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고 이만큼 축복해 주었건만 나는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 버리고 세상의 재물과 즐거움에 취해서 그 곳에 그냥 주저 앉아 버립니다.
내가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이제는 주님만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했다고 나의 편리대로 나의 편안함과 안락 때문에 하나님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립니다,
하나님이 이런 나를 그냥 놔두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또 나를 간섭하십니다.
세상의 쾌락과 즐거움에 빠져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취해 있는 나를 “이제 할수 없다”하시면서 또 간섭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 얍복나루에서 야곱에게 또 한번 손을 대기로 하셨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34장입니다.
1,2절,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더니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려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
자기의 딸이 강간당합니다.
얼마나 큰 비극이고 슬픔입니까?
고향에 돌아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겨준 사명을 다 잊어 버리고 편안하게 안주하려고 했더니 어느 날 야곱의 삶을 뒤집는 폭풍우가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내가 지금 누리는 이 세상적인 부와 행복이 너무 좋아서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간다면 우리의 삶속에도 하나님이 한순간에 이런 폭풍우를 몰고 올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좀 편안해지려고 또 즐거움을 찾기 위해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을 잊어 버린다면 하나님이 한순간에 나의 삶속에 이런 고통과 슬픔을 줄 수 있다는 사실 앞에 우리의 영혼은 깨어져야만 합니다.
“빨리 회개해야지! 내가 주의 명령을 잊고 살았기 때문에 이 어려움을 주시는 구나. 회개해야지!”
그러나 이 사건 속에서 야곱은 회개는 커녕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 사건을 수습하려고 몸부림을 치다가 결국에는 수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 야곱의 모습을 주의 깊게 살펴 보세요.
야곱이 하나님께 대해 불순종하니까 야곱에게만 고통이 온 것이 아니라 그의 자녀들에게까지도 비극이 왔습니다.
그의 사랑하는 땅은 강간 당하죠. 그의 아들들은 이런 분노를 참지 못하여 살인을 범하고 떼 강도가 됩니다.
더구나 이 사건 때문에 그의 아들 가운데 한 자손은 자손 대대로 큰 축복을 받지 못하는 지파가 됩니다.
부모의 잠깐의 잘못이, 아버지가 하나님 말씀에 대해 불순종 했기 때문에 그것이 부모의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에게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제 이 일이 어떻게 전개되어 갑니까?
25절 “제 삼일에 미쳐 그들이 고통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비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부지중에 성을 엄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누가 살인자가 됩니까? 시므온과 레위가.
자기 누이동생이 원통한 일을 당한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의 백성답지 않은 살인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복수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중대한 범죄입니다.
이것 때문에 시므온 지파는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큰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창세기 49장 5절에는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이것은 야곱이 죽으면서 그들의 아들들에게 축복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시므온과 레위는 축복의 기도가 아니라 오히려 살벌한 저주의 기도를 합니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손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력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흩으리로다”
왜 그렇습니까? 살인을 했기 때문입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라”
이 두사람이 똑같은 복수 사건에 같이 행동했기 때문에 시므온과 레위가 같이 언급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사건을 보시면서 우리가 주위의 친구를 잘 사귄다는 것이 얼마 중요한 일입니까?
두 형제 중 한 사람만 만류 했어도 상황은 달라질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좋은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비밀 중의 하나는 내 주변에 얼마나 경건한 신앙인들이 나를 둘러 싸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내 신앙인 연약할 때 나를 돌보아 주고 나를 격려해 줄 수 있는 신앙의 사람들이 얼마나 나의 주위에 있습니까?
나의 주변에 신앙적으로 좋은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나의 신앙도 좋아 집니다.
같이 모여서 교제하고 신앙 생활 하다 보면 서로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습관에 젖혀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자리를 같이하면 자연히 나도 부정적인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낙심이 되고 신앙이 떨어지면 다른 사람에게도 자꾸 나쁜 소리를 해서 그도 낙심되고 신앙이 떨어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입술을 열때마다 찬양과 기도가 샘솟는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 내 삶도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보세요. 시므온 지파의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민수기 1장 22,23절 “시므온의 아들들에게서 난 자를 그들의 가족과 종족을 따라 20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만한 각 남자를 그 명수대로 다 계수하니 시므온 지파의 계수함을 입은 자가 오만 구천 삼백명이었더라”
그런데 40년이 지난 후에 인구 조사를 한 것을 보세요.
민수기 26장 14절, “이는 시므온 종족들이니 계수함을 입은 자가 이만 이천 이백명이었더라”
인구가 늘었습니까? 줄었습니까?
인구가 불어나는 것이 정상인데 인구가 줄었습니다.
59,300명에서 22,200명으로 37,100명이 줄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여기에서 복수와 증오의 감정을 가진 사람들을 외면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미움을 가지고 증오의 씨앗을 뿌린 사람들의 그 삶에 대한 대가를 하나님은 그 자손들을 통해서 받아 내십니다.
물론 시므온은 자기 누이를 더럽힌 적들을 어떻게 그대로 둘 수 있을까?하는 일종의 정정당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목적은 언제나 올바른 수단과 올바른 과정을 요구합니다.
복수, 살인, 미움을 잘못된 감정을 가지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을 때 이 지파는 심각하고도 어려운 고난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살아 있는 역사적 교훈입니까?
시므온 지파가 처음부터 소외된 지파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영광된 지파였습니다.
시므온이 어떻게 해서 태어났습니까?
창세기 29장 33절. “그가 다시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총이 없음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도 주셨도다 하고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여기 시므온 옆에 아라비아 숫자로 2라고 씌어 있습니다.
성경 아래 부분에 그 뜻이 무엇입니까? “들으심!”
르우벤은 ‘보라 아들이라’고 시므온의 이름의 뜻은 ‘들으신다’라는 뜻입니다.
레아가 총이 없으므로 레아의 간구함을 주께서 들으셔서 아들을 주셔서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시므온은 레아의 기도 응답의 결과로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기도의 응답으로 태어난 아들!’
그 출생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하나님의 기대를 가지고 출발한 시므온이 나중에는 쓸모없는 인생으로 마칩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사실은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언제나 하나님께 받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은총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속에서 그 역사적 경험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가장 중요한 두 단어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라는 단어와 ‘듣고’라는 단어입니다.
출애굽기 3장 7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부고를 알고”
“고통을 보시고”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역사적 경험 속에서 언제나 그들의 마음을 설레이게 했던 사건은 “하나님은 보신다” “하나님은 들으신다”라는 두가지 사건이었습니다.
만일 오늘 우리의 신앙 속에서 이 두가지 단어에 깊은 관심을 갖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관계를 맺는다고 가정해 보세요.
“주님이 나를 보십니다”
쉽게 말하고 있지만 “주님이 나를 보신다는 사실은 우리는 얼마나 쉽게 잊어 버리고 살아 가고 있습니까?
종교 개혁자 칼빈의 일생의 삶의 표어는 “하나님 앞에서”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십니다.
지금 여기에서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십니다.
나의 모든 행동을, 말을, 생각을, 내 마음속에 동기를 그 분은 보십니다.
우리는 흔히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세요.
하나님이 나를 보십니다.
그 분의 불꽃 같은 눈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십니다.
나의 눈물을 보십니다. 나의 아픔을 보십니다. 나의 고통을 보십니다. 나의 괴로움을 보십니다.
유혹에 빠지려고 하는 나를 보십니다. 범죄 하려고 하는 나를 보십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나를 보신다는 사실은 위로와 축복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범죄하려고 계획을 세운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나를 보신다는 사실은 못내 괴로운 사건일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보십니다.
우리의 신앙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열쇠는 하나님이 나를 보신다는 사실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은 내 소리를 들으십니다.
내 입술로 뺃아놓는 말만 들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은 내 마음의 깊은 곳에서 고통하는 내 신음소리도 들으십니다.
내 아픔도 들으십니다.
시므온이라는 말은 들으셨다는 뜻입니다.
내가 어떤 제목을 위해서 기도하고 나서 그 기도의 응답을 받는 기쁨이 있다면 성도들과 만나서 교제할 때 “주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셨다”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은 성도가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이렇게 기도 응답과 축복속에 태어난 아들 시므온이 증오와 살인 때문에 저주 받는 아들고 되어 버립니다.
특별히 신명기 33장에 보면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을 남기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다른 모든 지파에 대한 축복을 다 합니다.
그러나 시므온 지파에 관한 축복만은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모든 지파들을 축복하는 가운데서 생략된 지파가 시므온 지파입니다.
물론 이름은 남아 있지만 시므온은 ‘잊혀진 지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간주하지 않으시는 이 모습을 보세요.
하나님은 그들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향한 최대의 형벌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선언이겠습니까?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이러한 비극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들이 마지막 날 예수님 앞에 나와서 말합니다.
“주님,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교회 직분도 감당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설교도 했습니다.”
이 때 주님께서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우리 주님의 이 선언은 인간에게 있어서 최대의 비극입니다.
내가 주님을 안다고 하지만, 내가 주님을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이 나를 아시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나를 아십니까?
시므온을 보세요.
그 인생의 출발이 얼마나 아름다웠습니까?
그 어머니가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다’는 감격에서 그 이름조차 “들으셨다”로 짓고 시작을 했지만, 증오와 복수의 감정을 자기의 마음속에서 가라 앉히며 못해 비극으로 그 인생이 마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서 이 시므온의 비극을 보면서 깊은 영적인 깨달음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 앞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받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줍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하나님 앞에 오는 순간부터 하나님은 나에게 기대를 거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출발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기대를 거십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기대를 거십니다.
그러나 기억하세요.
만일 우리가 하남니의 거룩한 뜻을 저버리고 회개함이 없이 범죄속에 빠져 있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하는 사실을 기억 하세요.
하나님은 나를 버릴 수가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은 나의 구원을 빼앗아 간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이 세상에 아무런 쓸모없이 내버린 사람들처럼 될 수가 있습니다.
맛 잃은 소금처럼, 사람들의 발에 밟혀져 나중에는 밖으로 던지움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쓸모없는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대를 가지고 출발했던 내 인생이 이제 쓸모없이 이렇게 끝날 수가 있는지요?
그러나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두려워해야 할 삶의 과제입니다.
고린도 전서 9장 27절에 보면 바울이 한가지 두려워하고 있는 사실을 봅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
여기에 바울의 걱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버림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버림’이란 말은 구원 받았던 사람이 다시 구원을 잃어 버리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한번 받은 구원은 빼앗기지 않습니다.
여기에 버림은 자격 상실이빈다.
나를 통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습니다.
나를 통해서 교회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나를 통해서 교회에 부흥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나를 쓰십니다.
그러나 나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나를 안 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두려움은 “어느 날 내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나를 쓰시지 않는다면”이라는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쓰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
“하나님의 영광이 내게서 떠나고 하나님의 손길이 내게서 떠난다면 어떻게 하나?”
저도 항상 이런 두려움이 있습니다.
“나의 범죄로, 나의 교만으로, 나의 죄악으로 하나님이 나를 더 이상 안 쓰신다면 나는 어떻게 하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므온의 비극은 오늘 우리들에게 깊은 교훈을 줍니다.
“내가 잊혀지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소중스러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을 수 있겠습니까?
“세월이 지날수록 내 얼굴에는 거룩한 광채가 나고, 내 마음 속에는 그리스도의 생수가 흘러 나오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내 인생의 마지막을 장식할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내 겉사람은 후패하나 내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비록 내가 늙어 가지만 나를 바라보면서 “내 속이 변하고 있고 내 인격이 그리스도를 닮아 가고 있어!”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면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아니면 좋게 출발해서 나쁘게 끝맺음을 한 시므온의 길을 나도 걸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시작이 중요하지만 끝은 더욱 중요합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 최후가 아름답기를 위해서 기도해야만 합니다.
“주님! 내 인생의 끝을 더욱 아름답게 맺을 수 있도록 성령께서 나를 깊이 붙잡아 주님 앞에서 나를 변화시켜 주옵소서”
엘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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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 오전 11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