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흠] 잘못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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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잘못된 출발
본문 : 창세기 38장 1-19절
설교 :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성경을 읽다보면 이해하지 못한 사건들을 발견합니다.
성경은 세계 제일의 베스트 셀러이고 가장 위대한 책이며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얻고 귀한 삶의 본보기와 교훈을 얻습니다.
그런데 성경 속에는 지저분한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기사들이 많이 나옵니다.
아버지와 딸들이 관계하여 아들을 낳은 사건,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관계하여 아들을 낳는 사건,오빠가 동생을 강간하는 사건,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이 남의 아내와 간통하고 그 남편을 죽이고 그 여자를 자기의 아내로 삼는 사건,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사람이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기 아내를 남에게 주는 사건 등.
세상의 소설책보다 더 못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성경의 정직성이 있습니다.
성경은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잘못, 죄악, 실패를 여지없이 폭로합니다.
이것은 위대한 사람들의 실패의 본보기를 통하여 우리에게 더 많은 교훈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도 아주 생각지 못한 희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의 가문에 일어난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숨기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지없이 폭로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가문이 어떤 가문입니까?
이스라엘의 가장 명문가인 왕족입니다. 유다는 다윗왕의 조상입니다.
이뿐 아니죠? 유다의 가문을 통해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 예수님이 탄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계가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관계를 해서 낳은 아들로 이어져 내려 왔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허물 많고 죄많은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과거에 허물과 죄가 많았던 사람들이지만 하나님 앞에 돌아 왔을 때 그들의 모든 죄악이 용서함 받고 새로워 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의 과거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과거에 이런 잘못을 했고 이런 죄를 진 몹쓸 사람이라는 것 깨문에 나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은 죄를 회개해서 용서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의 과거의 죄와 그 어떤 잘못이라 하더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이 씻어 주십니다.
나의 범죄함이 주님 안에서 용서되었을 때 하나님은 나를 통하여 위대한 일을 하십니다.
유다도 예수님의 조상이 될 수 있고 다말도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유다처럼 미약하고 실수가 많은 사람입니다.
죄도 많이 짓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가 어떠한 죄를 지었다할지라도 나의 죄를 하나님께 고하면 하나님께서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나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실 뿐만 아니라 나를 사용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삶이 가난하고 비참하다고 절망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일어 서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유다를 통하여 우리 스스로를 살펴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유다가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로, 신앙의 공동체를 떠났던 사람입니다.
1절,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서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에게로 나아 가니라”
유다가 자기 형제들을 떠나 가나안 사회 안으로 깊숙히 들어 갑니다.
이것은 유다의 타락을 의미합니다.
야곱 집안은 4대에 걸쳐 가나안 땅에 살아왔지만 마치 물과 기름처럼 그들과 섞이지 않았다.
가나안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이방 신들을 섬기며 타락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야곱 가족들은 자기들의 신앙을 지키며 가나안 사람들과는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구별을 과감하게 깨뜨린 장본인이 바로 유다였습니다.
유다는 자기 형제들을 떠나 가나안 사람들 속에 깊숙히 들어 가서 그들과 어울려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가나안 여자와 결혼해서 세 아들을 낳았고
큰 아들을 가나안 여자와 결혼 시켰습니다.
이것은 유다가 하나님 나라의 비젼을 버리고 완전히 이 세상에 동화되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서(형제로 부터)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에게로 나아가니라”
여기서 유다가 잠시 볼일이 있어서 다니러 갔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 형제들과의 관계를 끊고 완전히 가나안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유다가 지금까지 이방 사람인 가나안 사람들과는 구별되어 아버지 야곱 밑에서 신앙의 공동체를 형성하여 믿음을 지키며 살았는데 이제는 신앙적인 모든 생활을 포기하고 아둘람 사람 히라와 연합하여 살려고 거처를 옮겼다는 뜻입니다.
유다는 거기서 가나안 여자와 결혼하여 완전히 정착하고 수십년간 살았습니다.
2절,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취하여 동침하니”
유다가 왜 자기 형제들을 떠났는지는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 이방 세계가 더 재미있고 매혹적이고 잘 살 것 같은 생각이 들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버리고 자기 형제들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는 자기의 신앙만 타락한 것이 아니라 자녀들의 신앙까지도 타락하게 만듭니다.
6절,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취하니 그 이름은 다말이더라”
아들까지도 믿지 않는 이방인 여자와 결혼시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납니까?
7절,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얼마나 끔찍한 비극입니까?
유다가 신앙을 버리니까 자기만 신앙을 떠난 것으로 끄치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까지도 신앙으로 인도하지 못해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서 악하게 살아 하나님이 그를 죽입니다.
이것이 누구의 잘못입니까?
다 그의 아버지 유다의 잘못으로 인한 벌입니다.
성경에는 이 유다와 비슷한 일을 겪은 그의 후손 가운데 한 가정을 또 소개합니다.
룻기 1장에 보면 엘리멜렉의 가정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잘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 기근이 들자 살기 위해서 고향을 떠나 이방 나라인 모압으로 이사를 합니다.
거기서 자기 두 아들을 이방 여자와 결혼을 시키고 거기에 정착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기뻐하지 않아 엘리멜렉과 두 아들이 다 죽임을 당합니다.
육신의 행복을 찾아 더 잘 살기 위해 신앙의 공동체를 버리고 세상으로 내려간 결과가 자신과 두 아들의 죽음이라는 비참한 결과를 맞이 했습니다.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자기 부모 형제가 있는 신앙의 공동체를 떠나 이방으로 간 결과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두 아들의 죽음이라는 비극을 맞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의 공동체를 떠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모양 저 모양의 이유를 대면서 신앙의 공동체를 떠납니다.
“하나님이 과연 살아 계신가?”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는가?”하는 신앙적인 확신이 없어 신앙의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교회를 떠납니다.
신앙의 자기의 삶에 유익이 되지 않는다고 스스로 판단하거나 교회보다 세상이 더 좋으면 언제든지 신앙의 공동체를 떠납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는 신앙의 공동체를 떠나는 것은 매우 불행스러운 일입니다.
마귀는 신앙의 공동체속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을 노리고 있습니다.
신앙은 같은 어울려서 서로 도와가며 기도해 주며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혼자서 유지하기가 힘듭니다.
내 믿음이 아무리 좋아도 믿음이 약해 질 때도 있고 신앙에서 슬럼프가 생길 때도 있습니다.
이 때 주위의 믿음이 좋은 누군가를 나를 이끌어 주어야 하고 나의 손을 붙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다는 자기 발로 신앙의 공동체를 떠나 이방 사람들 속에 파묻혀 삽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성적으로 문란하게 사는 것을 싫어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왜 자기 아들을 위해 종을 가나안 땅이 아닌 멀리 고향 땅까지 보내 신부를 구해 오게 했습니까?
왜 이삭은 야곱에게 결혼을 자기 삼촌 집에 가서 하라고 했습니까?
다 신앙의 공동체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손자인 유다는 이방사람들 속에 들어가고 너무나도 쉽게 가나안여자와 결혼합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전혀 관심이 없이 하나님의 약속과 신앙을 포기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유다를 사랑하셔서 자기 길을 가지 못하도록 징계하심으로 가나안 생활을 실패하게 만듭니다.
유다의 장자 엘이 악한 죄를 져서 하나님이 그를 죽입니다.
그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얼마나 악한 죄를 지었기에 하나님이 그를 죽였습니까?
그의 죄가 그의 큰아버지 시므온과 레위가 저지른 살인죄보다 더 컸을까요?
시므온과 레위는 분노 때문에 칼을 가지고 죄없는 사람까지 마을 전체를 몰살 시켰습니다
엘의 죄가 자기의 아버지와 삼촌들이 자기 동생 요셉을 시기해서 죽이려고 하고 노예로 팔아 먹은 죄보다 더 클까요?
자기의 큰아버지 르우벤이 자기의 계모와 간통하는 죄보다도 더 클까요?
엘이 무슨 엄청난 죄를 지었길레 살인이나 간음, 그리고 자기 형제를 팔아 먹는 죄를 지은 야곱의 아들들의 죄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께서 유다의 아들의 죄에 대하여는 급하게 징게하여 죽이셨을까요?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죄의 크기가 문제 아닙니다. 죄의 질이 아니라 신앙의 공동체의 문제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무서운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은 아직 아버지 집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야곱의 집은 구약 시대의 교회이고 거기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있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있는 공동체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고 하나님이 함께 했고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신앙의 공동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호막으로 둘러싸인 피난처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보호막 안에 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웬만한 시험은 그냥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신앙의 공동체가 완전하지도 않고 문제도 많아 보이고 자기 욕망을 채워 줄 것 같지도 않으니까 제 마음대로 들락날락거립니다.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유다가 이 신앙의 공동체를 쉽게 떠난 것은 실수였습니다.
유다는 이 신앙의 공동체를 떠나 세상으로 갔을 때에는 세상에는 그를 지켜 줄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습니다.
그의 방패막이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는 결국 사랑하는 아들 엘과 오난을 잃은 후 흉년이 들었을 때에야 비로소 만신창이가 되어서 돌아 옵니다.
이것은 엘리멜렉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멜렉이 아무리 유다 땅에 기근이 닥쳐도 굶어 죽을 것을 각오하고 베들레헴에 머물러 있었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 가족들을 지켜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떠나 모압으로 갔을 때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의 보호을 받을 수 없었고 결국 남자 셋이 다 죽고 말았습니다.
고린도 전서에 보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무서운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인 중에 무서운 죄를 지은 한 성도를 교회에서 내쫓음으로써 그를 사단에게 넘겨 주라고 합니다.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고전 5:5)
교만하게 죄를 짓고서도 회개하지 않는 형제를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더 이상 보호해 줄 이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를 내 쫓아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실컷 하게 내버려 두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회개하고 돌아 오면 그 때 다시 받아 줄 수 있습니다.
유다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그는 하나님 백성들의 공동체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세상으로 떠났지만 가나안 땅에서 실패하고 두 아들을 잃은 후에 비참한 모습으로 돌아 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공동체는 사탄의 엄청난 세력으로부터 한 영혼 한 영혼을 지켜 주는 피난처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보내 교회안에 있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신실하게 속해 있다는 것은 세상의 수많은 유혹과 시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신앙의 공동체를 떠나면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 별 꼴을 다 보고 너무 큰 상처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교회를 떠나서는 안됩니다.
신앙의 공동체를 떠나는 그 순간 내 영과 육은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너무 가볍게 여깁니다.
신앙의 공동체 안에 축복이 있고 하나님의 보호막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고 싶으면 나오고 빠지고 싶으면 빠집니다.
아주 자기 마음대로 들락날락거립니다.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이 때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권해서도 듣지 않으면 그냥 자기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둘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그것이 큰 고통이며 저주스러운 일입니까?
실컷 자기 마음대로 욕심대로 살다가 나중에 만신창이가 됩니다.
그 때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감사하지만 실제로는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 것만을 생각합니다.
세상으로 가면 재미 있고 세상으로 가면 내가 무엇인가를 움켜 쥘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공동체는 따분하고 재미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공동체를 덮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고 은혜가 있습니다.
결코 이 신앙의 공동체를 떠나서는 안됩니다.
예배에 빠지고 주일을 범하는 것을 대수롭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졸아도 교회에 와서 졸아야 합니다.
넘어져도 교회에 와서 넘어져야 합니다.
세상이 얼마나 위험합니까?
세상에 얼마나 많은 영적인 유혹이 있습니까?
사람들의 영혼이 얼마나 병들어 있습니까?
내가 보호 받고 치료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믿음의 공동체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유다 같은 어리석은 행동을 범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신앙의 공동체를 떠나면 나는 죽은 목숨이다’ 생각하시고 어떠한 어려움과 상처가 있어도 신앙의 공동체를 떠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일날 피곤해서 자고 싶어도 교회 나와서 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일평생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 주님을 섬기면서 아름답게 신앙 생활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유다는 이중적인 가치를 가진 사람입니다.
11절, “유다가 그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비 집에 있어서 내 아들 셀라가 장성 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 아비 집에 있으니라”
유다가 왜 며느리를 친정집으로 보냈습니까?
며느리를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그 이유는 자기의 막내 아들까지 죽을까 봐였습니다.
그는 ‘왜 자기의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이 죽었는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죽은 자기의 마음도 아프지만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청상 과부가 된 며누리의 마음은 오죽하겠습니까?
그것도 두번씩이나 입니다.
그런데도 며누리를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유다는 너무나 이중적이고 악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죽이자고 할 때 유다가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동생을 죽여서 우리에게 유익이 없으니 동생을 돈 주고 노예로 팔자고 제안했습니다.
철저하게 계산적이고 자기 이익을 따라 가는 사람입니다.
동생을 돈 주고 팔아서라도 자신에게 이윤을 남기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말을 잘합니다. 설득의 명수입니다.
형제들을 설득해서 동생을 노예로 팝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버지 야곱을 설득하여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나중에 애굽에 갔을 때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요셉을 자기 동생인줄 모르고 설득하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이지만 실리를 추구하는 이중적인 사람입니다.
유다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찬송”
레아가 네번째 아들을 낳고 너무 기뻐서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하고 그 이름을 ‘유다’라고 지었습니다. (창29:35)
그러나 그의 가치관과 세계관은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자신 이름만큼의 인격이 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유다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뜻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그 이름만큼의 값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혹시 내가 유다와 같은 사람은 아니십니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이중적인 가치관을 가진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기독교가 욕을 먹습니다.
교회에 와서는 거룩하고 하나님의 사람 같은데 교회문만 나서면 거룩은 사라지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주일에 교회에서만 사용되는 것이고 일단 교회 밖을 나서면 믿는 사람인지 안 믿는 사람인지 전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경적인 가치관,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과 모습은 상황에 따라 변합니다.
그가 이방인 속으로 살러 들어 간 것도 자기의 이익에 따라 간 것일 겁니다.
결혼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신앙적인 가치관에 따라 결혼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선택하여 아내를 얻은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하여 가나안 여자를 택하여 결혼했습니다.
며누리를 맞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며느리를 얻기 위해 천리 길이나 되는 밧단 아람까지 종을 보내어 리브가를 데리고 왔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한 사람의 며느리가 그렇게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자기도 세속적인 잣대로 이방인과 결혼하고 아들들도 신앙과는 상관없이 이방인과 결혼 시켰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유다의 모습이 오늘날 나의 모습은 아니십니까?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결혼 할 때에 제일 우선 순위가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믿는 것이고 자식들이 결혼을 하는 것은 예외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앙과는 상관없이 일류대학 나오고 돈이 많으면 예수 믿던 안 믿던 상관없이 결혼 시킵니다.
그렇게 결혼하고 나서 신앙 때문에 십년, 이십년 피눈물 흘리며 고생합니다.
유다를 보세요.
그는 세상적인 판단으로 신앙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모르는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그 사이에서 난 아들들이 신앙적으로 잘 자랄 수 없습니다.
철저한 신앙 교육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바른 신앙관을 가질 수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도 모르고 죄 짓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6,7절,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취하니 그 이름은 다말이더라,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유다의 장자 엘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죄를 범하다가 하나님이 그를 죽이십니다.
죽임을 당할만큼 그의 범죄함이 컸습니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나님을 철저하게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 났습니다.
둘째 아들 오난도 자기의 재산이 형수에게로 가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기고 남편의 의무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해서 하나님께서 그도 죽이셨습니다.
8-10절,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의 본분을 행하여 네 형 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형에게 아들을 얻게 아니 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그 일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이것은 그 유명한 형사취수제도입니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형의 후손을 남기는 풍습입니다.
고대 우리나라도 이런 제도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이것은 상속과 관계가 됩니다.
부모가 아들에게 재산을 물려 주어야 하는데 그 아들이 자녀가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관계를 맺어 아들을 낳게 합니다.
그러면 그 아들은 동생의 아들이 아니라 죽은 형의 아들이 되고 죽은 이의 몫을 물려 받습니다
이 경우에 동생은 큰 희생을 당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형의 몫까지 자기 것이 되는데 형에게 아들을 만들어 줌으로 자기 몫이 줄어 드는 꼴이 됩니다.
그래서 오난이 형에게 아들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 질외사정을 합니다.
겉으로는 아버지의 말슴에 순종하며 죽은 형을 불쌍히 여기는 체하면서 실제로는 결정적인 순간에 형수가 임신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큰 위선이고 음란한 짓입니다.
즐길 것은 즐기면서 자기 임무는 감당하지 않는 음란이고 간음입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형의 아들을 낳게 해 주기 싫다고 했다면 그것을 끝나는 것인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즐기기만 하고 죄를 범합니다.
아버지의 이중적인 가치관을 아들이 그대로 따라 갑니다.
유다가 신앙에 따른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에는 두 아들을 죽이게 되는 무서운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유다의 이중적인 신앙관, 이중적인 가치관 때문에 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믿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 그의 삶의 태도 때문에 생겼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예수 믿는 사람답게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나의 삶으로서 하나님을 드러 내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저 사람은 하나님 믿는 사람이구나!”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이것이 신앙 교육이 되고 우리 자녀들도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는 축복받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축원합니다.
세째로, 유다는 신앙의 편리주의 자입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이름을 믿고 사는 사람이면서도 신앙에 있어서 편리주의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편리한 대로 행동했습니다.
삶에는 성실성이 없고 믿을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11절, “유다가 그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비 집에 있어서 내 아들 셀라가 장성 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 아비 집에 있으니라”
그는 아들을 얻으려고 하는 며느리 다말에게 셋째 아들 셀라가 자랄 때까지 집에 가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셀라가 아들을 낳을 수 있을만큼 자라게 되면 다시 부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가치관과 신앙이 철저하지 못하니까 자기가 한 약속을 제대로 지킬 생각은 하지 않고 피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 편리에 따라 가치관도 신앙도 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따르고 이익이 될 것 같지 않으면 따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의 편리주의자가 되어서는 결코 안됩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겠다.
내가 손해 보는 일이 있더라도 심지어는 죽는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겠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유다는 신앙의 편리주의자 였지만 그의 며느리 다말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말이 남편이 죽은 후 그는 얼마든지 다른 남자와 재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말은 그렇게 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씨를 원합니다.
유다가 셋째 아들을 주지 않으니까 창녀로 변장하여 유다를 속이고 시아버지와 관계를 하여 기어이 아들을 낳습니다.
왜 다말이 그렇게 히브리인의 씨를 원했을까요?
여기에 다말의 놀라운 신앙의 비밀이 있습니다.
다말은 유다의 집안에 시집 와서 새로운 세계를 보았습니다.
비록 유다가 신앙의 공동체를 떠나고 타락하고 침체된 이중적인 생활을 하였지만 그들은 가나안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지금은 냄새가 많이 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속에는 자기들과는 다른 무엇인가의 신앙의 세계가 있었습니다.
그는 시아버지 유다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야곱의 집에 약속하신 축복의 비밀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 씨를 가져야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을 움켜 쥘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이스라엘의 아들을 낳으면 합법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유다의 재산이 탐나서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 나라의 당당한 백성이 되고 싶은 소원과 자기 후손으로 하여금 그 나라 안에서 당당하게 땅을 차지하는 축복을 받게 하고야 말겠다는 열망 때문에 시아버지를 통해서라도 아들을 갖습니다.
이것은 옳은 일은 아니지만 신앙을 행한 집념은 귀한 것입니다.
다말은 결국 자기의 소원대로 이스라엘에서 가장 복받는 여자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고 오는 세대에 다말을 복있는 여자로 칭송했습니다.
다말은 다윗의 왕가의 할머니가 되고 그의 후손에서 온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의 편리주의로 사는 사람과 신앙을 얻기 위해서는 수치를 무릎쓰는 사람을 보세요.
신앙의 편리주의자로 사는 유다는 오히려 망신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얻기 위해 자기 자신을 가감하게 던진 사람에게 하나님은 축복해 주셨습니다.
아무 누구도 다말이라는 이 이방 여자를 주의해 보는 사람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고 계셨습니다.
다말 자신은 몰랐지만 하나님은 수많은 타락한 여자들 가운데서 그녀를 보고 계셨고
유다의 타락과 시련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다말을 통하여 우리는 귀한 교훈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잃어 버린 만큼 주님이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주님을 위해서 돈을 잃어 버린 사람에게는 그 잃어 버린 돈만큼 주님께서는 역사하십니다.
주님을 위해서 친구를 잃어 버린 사람에게는 그 잃어 버린 친구만큼 주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미래를 잃어 버린 사람에게는 그 잃어버린 미래 이상으로 주님이 갚아 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여기에 신앙의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손해를 보아도 결코 슬퍼 하지마세요. 그것은 손해가 아니라 오히려 이익입니다.
우리 앞에는 신앙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적으로 잘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말이 재혼해서 잘 살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세상적으로 잘 나갈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다말처럼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잃은 것 이상의 더 놀라운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라도, 다른 것은 다 포기하더라도, 나의 신앙, 나의 구주되신 예수님, 이 신앙의 공동체 교회를 포기하지 마셔서 주님께서 더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축복을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엘림교회
Penn Elim Presbyterian Church
703 Pen Ambler Rd.
Ambler, PA 19002
215-939-8470
주일 예배 : 오전 11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