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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철] 메이첸 박사 저 『근대세계 안에 그리스도인 신앙』(1936) -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알려지시는가? (How May …

복음뉴스 0 2022.04.11 14:57

메이첸 박사 『근대세계 안에 그리스도인 신앙』(1936) ②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알려지시는가? (How May God Be Known?)

글 : 이민철 목사 (맨해튼성도교회) 


1장 요약

 

우리는 심한 긴박감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그 들은 말하기를, 하나의 경제 체제가 무너진 것 같고, 다른 하나의 체제가 대치될 준비는 전혀 안되어 있다고 한다. 도처에서 실직(失職)과 가난을 볼 수 있고, 거의 도처에 전쟁이나 전쟁 소문이 있다고 한다. 비록 세계대전은 이제 끝났지만 그 긴박감은 여전히 크게 우리와 함께 남아 있다는 것을 아주 기꺼이 인정할 수 있다. 사실 그 긴박감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인류가 끝없이 깊은 구렁텅이 위에 서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이건 아니건 간에 생각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분명한 것은 인류가 끝없이 깊은 구렁텅이 위에 서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이건 아니건 간에 생각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분명한 것 같다. 하나님과의 관계는“가장 중요한”일이다. 그것은 목적을 위한 하나의 단순한 수단이 아니다. 그 밖의 모든 것은 그것에 대해 부차적인 것뿐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1장에서 소개하였다. 

 

2장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알려지시는가?

 

이 짧은 연속 강연의 첫 이야기에서 나는 여러분에게 왜, 내가 여러분이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세계(an unseen world)에 대한 관심을 연기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를 말하려고 했다. 이 세상이 절박한 문제들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만약 여러분이 먼저 여러분과 하나님에 대한 관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결코 그러한 절박(切迫)한 문제들을 바르게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어려움들은 오직 한층 더 강렬하게 우리의 관심을 그것에로 향하도록 해준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를 해결 하는 것이 중요하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알려지실 수 있는 것인가?(how can God be known to us?)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도대체 계신지 또한 만약 계시다면 그가 어떤 존재(being)이신지를 알 수 있는가?

 

우선 그 질문에 대해 말할 아주 간단한 내용이 있다. 그것은 내게 아주 분명하게 생각되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대체적으로 무시되고 있는 내용이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이것이다. 즉 만약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에 관한 어떤 것을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 하나님께서 그것을 말씀하시기 위해 우리를 택하여 주셨기 때문일 것이라는 것이다(God has chosen to tell it to us.).

 

많은 사람들은 아주 다른 추측(推測)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만약 그들이 하나님에 관한 어떤 것을 알 수 있다면 스스로 하나님을 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내가 보기에 그러한 추측은 극히 불가능하다고 생각된다. 만약 논증을 위해, 정당하게 ‘하나님’(God)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어떤 존재(a being)가 계시다고 가정한다면 우리 같이 연약하고 유한(有限)하고 단명(短命)한 피조물들이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시려는, 하나님 편에서의 어떤 의지가 없이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그를 발견한다는 것은 논리적 전제에 있어서 매우 불가능하게 보인다. 적어도, 나는 우리가 그런 식으로 발견할 수 있는 신은 발견할 가치가 거의 없는 존재일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인간의 연구조사의 수동적(受動的)인 주체 (passive subject)는 우리의 영혼의 갈망(the longing of our souls) 을 만족시킬 수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은 확실히 아니다.

나는 몇 년 전에 여러 가지의 글을 묶은 한 책에 원고를 내어 줄 것을 부탁받았다. 그 책의 전체 제목은 『하나님에 대한 나의 개념』My Idea of God이었다.)

 

여러 필자들이 제각기 하나님에 대한 자기 자신의 개념을 말하였다. 어떤 이는 “나는 하나님에 대해 이렇다고 생각한다.” 고 말했다. 또 다른 이는 “나는 이렇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금 나는 내가 그 책에 기고한 글이 어떤 특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감히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마 그것은 아주 보잘 것 없는 노작(勞作)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서두에서, 만약 하나님에 관한 ‘나의’(my) 개념이 참으로 나의 것이라면 내 자신이 그것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정당히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함에 있어서 최소한 옳았다고 매우 진지하게 주장하는 바이다. 자신을 나에게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계시(啓 示, to reveal)하시려는 그의 은혜로우신 의지를 떠나, 나의 노력으로 발견될 수 있는 어떤 신적 존재는 인간 자신의 본성(man’s own nature)의 어떤 일면에 대한 단순한 이름, 즉 우리가 우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이든가, 아니면 기껏해야 실험실에서 분석되는 물체들과 같이 연구조사의 대상이 되는 단순한 수동적인 사물(passive thing)이다. 

 

우리가 이러한 원리(principle)를 아주 확고히 붙잡아야 한다. 나는 우리는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기를 기뻐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굳게 확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to reveal Himself)하셨는가?

 

첫째로, 그는 그가 만드신 우주(the universe)에 의해서 자신을 계시하셨다. 세상은 어떻게 존재(being)하게 되었는가? 세상은 여기 존재하고 있다(It is here.). 이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존재(to be)하게 되었는가?

 

그 질문은 모든 사상가들의 관심을 일으킨다. 우리는 그것을 회피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것은 대답할 수 없는 문제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생각에서 제거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계속 동일하게 우리를 따라 다닌다. 그리고 수많은 세월 동안 그것은 인류(the human race)를 늘 따라 다녔다. 나는 우주 자체(the universe itself)가 그 질문에 대답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 대답 자체는 신비(itself a mystery)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신비이다. 그 대답은 매우 단순한 대답이다. 그 대답은 세상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만드셨기 때문에 존재하게(into being) 되었다는 것이다. 세상은 무한(無限)하시고 전지(全知)하시고 전능(全能)하신 하나님의 작품이다.

 

그 대답은 여러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모양으로 대답된다. 그것은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에 의해 자세한 추론으로 변호되었다. 그러한 추론은 ‘유신논증(有神論證)들’(theistic proofs) - 인격적인 하나님, 즉 세상의 창조자와 통치자의 존재를 가리키는, 세상 자체 안에 있는 암시들인 것 - 이라고 불리는 것들로 논리적으로 구분되었다. 나는 그것들이 좋은 증명들이라고 생각한다는 것과 기독교인은 그가 그것들에 대해 자세한 지식을 가지고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그것들을 무시하거나 철학자들과 학식 있는 사람들 가운데 행해지는 그것들에 관한 논쟁을 중요치 않은 문제로 여겨서는 결코 안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 외에는, 여기에서 그것들에 관해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메이첸)는 그러한 논증(論證)들에 대해 어떤 해설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하기를 원하는 것은 자연의 하나님에 대한 자연의 증거는 여러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온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뿐이다. 얼마 전 한 유명한 과학자의 강의를 들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 강사는 과학적인 연구의 진보 과정을 추적하였고 - 내가 바르게 기억하고 있다면 - 그는 그 중요한 유익들을 지적했다. 그러나 그 다음 그는 잠시 멈추고 과학적인 정신의 또 다른 하나의 산물(産物)에 대해 말했다. 그는 말 하기를, 참된 과학자는 마침내 궁극적인 신비에 직면하게 되고 그 지점에서 그는 종교적인 사람(a religious man)이 된다고 했다. 세상에는 끝없는 변화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연구의 진보 과정은 전자(電子, the electron)를 밝혀내었다. 그리고 그 전자들은 모두 똑 같다 - 그것들은 일정한 양상을 가진다. - 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그것들의 놀라운 동일성은 인간이 침입할 수 없는 신비의 존재(the existence of a mystery)를 나타내 준다. 참된 종교적인 두려움 속에서 과학자는 마침내 걷혀지지 않는 휘장인 교만(pride)을 힐책하는 신비 앞에 서 있다는 것이다.

 

나(메이첸)는 지금 그 과학자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a true knowledge of God)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가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I do not think that he had.). 만약 그가 나의 말을 듣기를 원했다면 그에게 학식 있는 과학자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어린 아이들을 위해서도, 그가 말했던 그 무서운 휘장이, 우리가 최소한 그 휘장 너머의, 신비를 볼 수 있도록 조용히 걷혀지는 방법을 기꺼이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그 과학자를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문 앞에까지 인도했던 자연의 일면(一面)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연의 하나님에 대한 자연의 증거가 그 과학자가 가지고 있었던 것과 같은 바로 그러한 자연에 대한 지식에 의해 온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자연의 존재 의미들에 대한 이성적 경의(敬意)(reasoned consideration of the implications)에 의해 온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브라우닝(Browning) 이 ‘저녁놀의 감격’(a sunset touch)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 온다. 이런 사람에겐 이런 방식으로 오고, 저런 사람에겐 저런 방식으로 온다.

 

내게는 자연이 산언덕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으로 아주 분명하게 말한다. 1932년 여름 어느 날 나는 알프스 산의 마터호른 (Metterhorn) ) 정상(頂上)에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거기에서 거의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마터호른을 경시하는 것은 오늘날의 등산에 관한 책들에서 인정된 내용이다. 그 위대한 산이 애석하게도 망쳐졌다고 말한다. 왜 그런가 하면 여러분은 윔퍼 (Whymper)의 시대) 에 등산가들의 야망을 그렇게 자극시켰던 그 바위들 위에서 심지어 꼬치통조림 깡통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메이첸)는 내가 마터호른에 섰을 때, 나는 단 한 개의 깡통도 본 기억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아마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그때 산 위에 있었던 이례적(異例的)인 하얀 눈더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또한 그것이 내가 어떤 사람들과 달리 어떤 다른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이탈리아의 평원의 광대함을 보았다. 그것은 무한(無限)에 대한 상징물과도 같았다. 먼 산들의 눈(雪)을 보았다. 나는 나의 발 아래 멀리 멀리에 있는 아름다운 푸른 골짜기들을 보았다. 이 세상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빛에 흠뻑 젖은 영광스럽고 찬란한 모든 산봉우리들을 보았다. 그리고 내가 이제 다시 내 앞에 있는 그 영광스러운 광경을 생각할 때, 나는 어머니의 무릎에서부터, 그 모든 영광이 누구 때문인가를 알았다는 사실을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감사함이 터져 나왔다.

 

그 뿐만 아니라 자연의 보다 온화한 아름다움들도 나는 사랑한다. 여러분이 나와 함께 그런 아름다움들을 사랑할지 모르지만 수년 전에, 화이트(White) 산맥에 있는 어떤 시냇가를 산책하였다. 나는 과거에 수많은 시냇물들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왠일인지 특히 그 시냇물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여러분에게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말하지는 않겠다. 왜냐하면 만약 내가 그렇게 한다면 여러분은 민간 식림(植林) 치수단(C.C.C.) ) 이나 국립공원 관리과에 그것에 관해 편지를 써서 그리고 관광도로를 놓아 달라고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곳은 영원히 더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그곳을 거닐었을 때 그곳은 자연 그대로였다. 나는 그곳에 대한 기억을 늘 가지고 있다. 그곳은 말로 표현(表現)할 수 없을 정도로 온화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나는 사람이 온 세상을 돌아다녀 보아도 화이트 산의 시냇물보다 더 사랑스러운 시냇물은 결 코 보지 못할 것이고 생각한다. 변화하는 자연의 다양함은 아주 놀랍고 아름답다. 

 

자연의 침묵도 또한 매우 계시적(啓示的)인 것일 수 있다. 나는 프랑코니아(Franconia) 산맥) 에 있는 어떤 산의 꼭대기의 햇볕 아래서 평화로운 반시간을 보냈던 어느 날을 기억한다. 나는 거기에서 매우 드문 어떤 경험을 하였다.

 

나의 친구들이여, 여러분은 그것을 믿어주겠는가? 그 햇볕 쬐는 산꼭대기는 참으로 조용하였다. 거기에는 자동차의 경적 소리가 없었다. 거기에는 재즈 음악이 없었다. 인간의 목소리도 없었다. 나뭇잎들의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없이 오직 이상한, 아늑한 침묵(a strange, brooding silence)만이 있었다. 참으로 귀한 시간이었다. 나는 내 생애에서 그것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나를 오해하지는 말아 달라. 내가 그것들을 사랑하듯이 모든 사람이 자연의 아름다움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정부가 국립공원들의 어떤 인공성(人工性)과 규칙성에 의해 항하고 있듯이 사람들의 영혼으로부터 자연에 대한 사랑을 꺾어버리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얼마간의 아름답고 우아한 귀여운 것들을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자연의 아름다움들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그가 만든 세상에서 계시(啓示)되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일에서 제외되어 있는가?

 

나의 친구들이여, 참으로 그렇지 않다. 참으로 그렇지 않다. 참으로 그렇지 않다. 세계의 존재의 신비는 여러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가온다. 예를 들면 나는 여러해 전에 수련회 오후 집회에서 한 교수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 나는 왜 내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 교수는 말하기를 자기에게는 유럽 여행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게 되었던,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돌아왔던 한 친구가 있었다고 했다. 그가 이 도시 저 도시 다니면서 들끓는 무리들, 남녀의 수많은 군중들을 보았을 때, 웬일인지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이 계시다.”(There is a God, there is a God.)는 확신이 그에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고 그는 말했다. 이것은 어리석은 상상이었는가? 이러한 경험들은 단지 무의미한 공상들을 아주 담대히 말했던 내 자신의 생애에 있었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것들은 저 너머의 놀라운 어떤 것에 대한 참된 증거들인가?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그가 만드신 세계의 영광을 통하여 나에게 은혜롭게 그 자신을 계시(啓示)하시고 있었던 순간들이었는가?

 

그리스도인은 후자(後者)의 대답을 하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는 성경에 의해 인(印)쳐진 보증을 가지고 있다. 성경은 분명히 자연은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한다고 가르친다.

 

로마서 1장 20절의 놀라운 구절에서도 사도 바울은 “창세로 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神性)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라고 말씀에 기록 되어 있다. 여기에서 성경은 세계의 존재로부터 세계의 신적(神的) 창조자의 존재를 조직적으로 논증하는 자들의 논증들을 인정한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우리가 그의 세계의 아름다움과 장엄함에서 갑자기 하나님의 자취를 보는 것 보다 더 비추론적(非推論的)인 지식의 섬광들을 인정한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91:1)라고 시편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이 있다. 그는 들의 백합화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 6:29; 눅 12:27)고 하셨다.

 

이 모든 말씀이 참되십니다.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는 매우 귀한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가 만드신 것들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셨다면, 왜 그 렇게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계시에 귀를 기울이는가?(why do so very few men listen to the revelation?) 자연을 묵상함으로써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는 참된 믿음에 도달한 자들이 거의 없다는 것은 명백(明白)한 사실이다. 그들의 종교적인 견해들이 때때로 기독교인들에 의해 주의함 없이 환영되고 있는 그러한 과학자들조차도 흔히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단지, 세계의 과정 자체에 내제해 있다고 상상된 어떤 정신적 목적(a spiritual purpose)과 동등한 하나님을 믿고 있다. 그들은 살아계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전혀 믿고 있지 않으며, 천지(天地)를 창조(創 造)하시고 진리(眞理)이신 하나님을 전혀 믿고 있지 않다는 것이 발견된다.

 

그것은 왜 그런가? 만약 하나님께서 그가 만드신 세계를 통하여 그렇게 명백하게 자신을 계시하셨다면, 왜 인간들이 보지 못하는가? 인간들이 무엇을 보지 못할 때, 그 사실에 대한 두 가지의 가능한 설명이 있다. 첫째, 볼 대상이 거기에 없다는 것이며, 둘째,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눈이 멀어 있다는 것이다. 그가 만드신 것들을 통하여 인간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함에 대하여 성경이 제시하는 것은 이 후자(後者)의 설명이다.

 

성경은 로마서 1장 21절의 구절에서 그것을 매우 명백하게 제시한다. 바울은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보지 못했다. 그 잘못은 자연에게 있지 않았다. 바울은 말하기를 사람들이 자연이 보여주는 것을 보지 못했을 때 그들은 “핑계치 못 할찌니라”(롬 1:20)고 말한다. 그들의 지성은 죄로 인하여 어두워졌다. 그것은 어려운 말씀이다(That is a hard saying.). 그러나 다른 많은 어려운 말씀들과 같이 그것은 참된 진리 말씀이다. 만약 우리 모두가 본래 태어난 그대로이고 우리의 눈이 신비스럽게 열려지지 않는 한 우리가 죄(罪)에 빠져(in sin) 눈이 멀어 있는 자들이라는 것을 이해(understand)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내가 말하는 것, 이 밖의 어떤 것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석 


메이첸의 My Idea of God, edited by Joseph Fort Newton, Litt. D., D. H. K., 1926.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 1812-1889): 영국의 시인이자 극작가이다. 바이런, 셀리의 영향을 받아 시인이 되었다. 알프레드 테니슨과 더불어 빅토리아 왕조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그의 시는 인간의 모든 강렬한 정열을 힘차게, 그리고 극적으로 노래한 것이 특징이다. 로버트의 부친은 희귀 도서 6천권을 가진 도서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는 깊이 생각해야 하고 또 어려웠기 때문에 그 가치는 그가 죽은 후에야 인정받게 되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남과 여》, 《등장인물》, 《반지와 책》 등이 있다. 6살 연상 아내인 영국의 시인 엘리자베스 브라우닝과 부부의 사랑을 노래한 아름다운 시를 써서 유명하다. 브라우닝의 처녀작은 『폴린: 고백의 단편(Pauline: A Fragment of a Confession)』(Nabu Press, 1833)은 시집이며, 이 시는 그의 애인, 시조 여성에 이름을 시인의 고백으로 1833년에 익명으로 출판되었다. 위 본문의 ‘저녁놀의 감격(a sunset touch)’의 시 구절은 그의 <믿음과 불신앙(Belief and Unbelief)>의 시의 ‘...Just when we are safest, there’s a sunset-touch,’의 구절을 메이첸은 인용함.(모든 각주는 본문 이해를 위한 역자(譯者)주임을 밝힌다.).

 

마터호른 산 혹은 마테호른 산은 알프스산맥에 있는 산이다. 스위스의 체르마트 마을 남쪽 10km,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에 놓여 있다.

 

에드워드 윔퍼(Edward Whymper, 1840~1911): 알프스 마터호른 초등한 산악 저술가. 윔퍼는 1865년 유럽 알프스의 미봉 마터호른(4,478m)을 최초 등반한 인물이다. 이 봉우리는 당시만 해도 인간이 결코 오를 수 없는 곳으로 여겨졌던, 수많은 이들이 도전장을 던졌던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1840년 영국 런던에서 출생한 그는 초등 당시 25세의 앳된 젊은이로, 1860년에 알프스를 처음 본 뒤 불과 5년 만에 마터호른 최초 등반에 성공했다. 그가 쓴 『알프스 등반기(Scrambles amongst the Alps in the years 1860-69)』(London : J. Murray, 1871)는 전 세계의 산악저널이 ‘역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다. 역자가 번역한 1951년 책인 J. G. 메이첸, 『기독교란 무엇인가(What Is Christianity?)』(New York, 2019)의 제26장(<산들과 우리가 그것들을 사랑하는 이유>, pp. 451-466)에 좀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2년 7월에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민주당 대통령후보 수락 연설에서 끝을 맺은 데에서 ‘뉴딜New Deal’ 명칭이 유래한 뉴딜정책은 그 다음 해인 1933년에 C.C.C. 민간 식림 (植林) 치수단(Civilian Conservation Corps)이 창설되었다.

 

프랑코니아(Franconia) 산맥은 미국 뉴햄프셔 주 화이트 산맥에 위치한 산맥이며, 화이트 마운틴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이다.

 

[편집자 주 : 2021년 12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7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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