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신문

 

[이민철] 성경 대(對) 인간 권위(THE BIBLE VERSUS HUMAN AUTHORITY)

복음뉴스 2 2022.06.25 17:38

근대세계 안에 그리스도인 신앙(1936) 8

7-1성경 대(인간 권위(THE BIBLE VERSUS HUMAN AUTHORITY)
: 이민철 목사(맨해튼성도교회)
 

 

7-1. 성경 대() 인간 권위

(THE BIBLE VERSUS HUMAN AUTHORITY) 

 

7-1장 성경 대() 인간 권위: 만약 성경이 우리가 말한 바와 같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성경을 그렇게 보는 것은 실제로 우리의 생활에서 무슨 의의가 있는가(what it actually means in our lives)하는 질문이 일어난다.

 

나는 여러분에게 이제 그러한 질문에 대해 잠시 이야기하기를 원한다. 비록 그 대답이 함의하는 어떤 내용들은 어렵다고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그 질문에 대답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만약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한다면, 성경은 진리(truth)에 대한 그리고 생활(life)에 대한 우리의 표준(標準, our standard)이 될 것이다. 우리가 어떤 메시지를 지지할 수 있는지 없는지 혹은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질문을 받을 때, 우리가 하는 것은 단순히 그 메시지나 그 행위를 성경과 비교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것은 단순히 그 메시지나 그 행위를 성경과 비교하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성경과 일치하면, 우리는 그것을 지지할 수 있고 그것을 따를 수 있다. 만약 그것이 성경과 일치하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권위들에 의해 어떤 명령을 받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지지할 수 없고 그것을 따를 수 없다.

 

나는 그것을 아주 분명히 해두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참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매우 심각한 의견의 차이(difference of opinion)가 교회 안에 나타난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의견의 차이와 관계가 있는 첫 번째 문제는, 제기되는 문제들에 적용될 판단의 표준(標準)이 무엇인가하는 문제이다. 만약 사람들이 그 예비적인 문제에 대해 일치할 수 없다면, 그들이 다른 모든 것에 대해 일치할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한 여름에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내가 어떤 사업가와 한 약속을 하였다고 생각해 보자. 약속은 11시이다. 나는 지방에서 올라와 정각 11시에 그 사무실에 나타난다. 그러나 내가 거기에 도착할 때, 나는 나와 약속했던 그 사람이 상당히 마음이 불안해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나에게 말한다.: “나와 이 분들을 이렇게 기다리게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약속은 11시 이었는데 지금은 정각 12시이다. 당신은 정확히 1시간 늦었다.” 그때 나는 같은 식으로 대답한다.: “나를 놀라게 하지 말라. 사실 나는 당신의 말의 진실성을 의심하고 있었다. 내 시계로는 정확히 11시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시계를 필라델피아 시내에 있는 어떤 관공서 시계에 맞추곤 하였다.” 우리가 그 일에 관해 상당히 오랫동안 크게 논쟁한 후 나는 필라델피아가 썸머 타임(day-light-saving time)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논쟁하던 그 일에 서로 다른 표준들(different standards)을 적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일치에 도달할 수 없었다.

 

교회 안에서의 의견의 차이도 어느 정도 그와 같다. 거기에서도 또한, 논쟁하는 당사자들은 서로 다른 표준들(異標準)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일치점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점에서 썸머 타임과 표준 시간에 대한 우리의 예()는 교회 안의 상황에 적용되지 않는다. 그 사업가와의 나의 상상적인 논쟁의 경우에는 둘 다 옳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두 표준들(二標準, two standards) 중의 어느 것이 사용되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어떤 특별한 차이가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썸머 타임을 따라야 하느냐 혹은 표준 시간을 따라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어떤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와 같이 우리는 둘 다 어느 것이 사용되고 있었는가에 관해서는 아주 분명하였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의 상황의 경우에는 논쟁하는 당사자들이 모두 동일한 것, 즉 진리(truth)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모두 옳을 수는 없다. 이 경우에서 찾고 있는 그 표준(the standard)은 날을 분할하는 것 같은 어떤 인위적인 방법이 아니라 그것은 진리에 대한 표준(a standard of truth)인 것이다. 그리고 진리는 상대적(relative)이 아니고 절대적(absolute)이다.

 

그 예()는 적어도, 만약 논쟁하는 당사자들이 서로 이해하려면(의견의 일치에 도달함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이 토론하여야 하는 첫 번째 문제는 어떤 표준(what standard)이 사용되어야 하는가하는 문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확실히 그러한 원리(principle)는 교회 안에 있는 의견의 차이에도 완전히 적용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가능한한 아주 날카로운 방법으로 서로를 구별하는 매우 열심 있고 신실한 사람들을 발견한다. 한 사람이 참되다고 생각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그릇되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이 지혜롭고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파괴적이라고 생각한다. 다투는 당사자들의 토론은 때때로 단지 문제를 더 악화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때때로 단지 더 큰 분노와 더 큰 혼란을 야기 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의 이러한 불행한 상태에 대한 이유 - 적어도 그것에 대한 한 가지 중요한 이유 - 는 완전히 분명하다. 그것은, 논쟁하는 당사자들이 그들의 의견의 차이의 진정한 이유가 그들이 진리와 생활에 대한 전적으로 그들의 다른 표준(their difference of opinion)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발견된다.

 

나는 이미 무엇이 우리의 표준인가(what our standard)를 말했다. 그것은 성경이다(It is the Bible).

 

우리가 어떤 선전을 지지할 수 있는지 없는지 혹은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 결정하고 있을 때, 우리는 단순히 그 선전이나 그 행위가 성경과 일치하는가 하지 않는가를 질문한다.

 

만약 내가 성경이라는 이 표준(this standard)을 오늘날 제안되고 있는 어떤 다른 표준들(the other standards)과 대조시킨다면, 나는 내가 성경을 이와 같이 진리와 생활의 표준(one's standard of truth and of life)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은 인간적 경험을 그들의 표준(their standard)으로 삼고 있다. 그들은 가장 좋은 것을 행하는 또는 실제적인 행위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나타나는 그러한 종류의 종교를 고수(固守)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수년 전에 어떤 대학에서 졸업식 설교를 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내가 설교를 마쳤을 때였다. 졸업반 학생 한 사람이 내게 질문하기를 내가 어떤 종교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하였다. 내가 그 운동의 이름을 말하지는 않겠다. 나는 그것을 지지할 수 없다고 암시하였다. 그는 대답하기를 자기 생각에는 그것이 오늘날 종교계에서 가장 생동적인’(vital) 운동이라고 했다. 그 젊은이와 그에 대한 토론에 아주 깊이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우리가 다른 표준들(different standards)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경험이라는 표준(the standard of experiece)을 사용하고 있었고, 나는 성경이라는 표준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젊은이는 우리가 토론하고 있었던 그 종교운동이 생동적이었기 때문에 좋아했다. 어떤 의미에서 정원에 있는 해로운 잡초들(noxious weeds)은 생동적이다. 그것들은 흔히 꽃들보다 더 신속히 성장한다. 그러나 주의 깊게 정원을 가꾸는 이는 그것들을 뽑아내려고 한다. 그와 같이 우리도 역시 단순한 성장의 신속성이나 신봉자(信奉者)들의 열심을 어떤 종교운동을 판단하는 척도로 삼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는 모든 운동을 성경으로 시험한다(we test every movement by the Bible).

 

만약 그것이 성경과 일치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한다. 만약 그것이 성경과 불일치한다면, 그것이 어떤 외적인 성공을 이룰지라도 그리고 심지어 그것이 우리의 피상적인 인간적 판단으로 볼 때 그 신봉자들에게서 여기저기에서 어떤 외형적인 덕()(apparent graces)을 가져오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반대한다. 만약 그 운동이 성경과 반대된다면, 그러한 외형적인 덕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받을 판단을 결코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과 충돌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경험을 진리에 대한 그리고 생활에 대한 표준(as the standard of truth and of life)으로 삼는 것은, 어느 곳에서 큰 질문소동’(the great inquiry racket)이라고 불리운 적이 있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의 기초가 된다.

 

최근에 종교문제에 관한 설문지(設問紙), ‘공개 토론회’, 그리고 각종 질문서에 대해 굉장한 붐이 일어났다. 그것은 중요한 시대적 공해(公害, nuisances)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일들 중의 많은 것들의 비과학적인 성격과 참된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회피를 생각할 때 그것들을 고려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처리하려고 한다. 그것들 중의 많은 것들은 참으로 전혀 질문서들이 아니다. 단지 설문지의 독특한 고안을 통하여 사상전파(propaganda)를 수행하는 매개체들이다. 그것들을 경영하는 사람들은 물론 정직하다. 그들은 진리(get at the truth)에 도달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기독교에 대해 전혀 공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그들의 설문지들을 작성할 때 심지어 그리스도인에게 그의 표를 던지거나 혹은 그의 확신들을 표현할 기회를 주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 댓글란으로 계속 -

Comments

복음뉴스 2022.06.25 18:49
- 본문에서 계속 -

그러나 비록 이러한 질문서들과 설문지들 중의 많은 것들이 터무니없게 비과학적이고 문제 회피적이기는 하지만 어떤 진지한 목적이, 비록 그것이 잘못된 목적일지라도 그것들의 기초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들의 기초에 있는 목적은, 여러 가지 종교형태들을 검토함으로써 비교(比較, comparison)와 배제(排除, elimination)의 과정에 의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가장 적합한 종교 형태, 즉 우리가 채택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종교 형태에 도달하려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러한 질문서들과 설문지들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혹은 적어도 그들 중의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경험을 진리와 생활의 표준으로 만들고 있는 것(making human experience the standard of truth and of life)이다.

그러한 그 표준(That standard)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표준(the standard to which we hold)과 전혀 다르다. 이 사람들은 종교에 있어서 ‘조정되는 화폐’(managed currency)를 옹호하고 있다. 반면에 우리는 금본위제(金本位制, gold standard)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의 표준은 유동적인 표준이 아니다(Our standard is not a flexible standard). 오늘날 참된 것이 인간생활의 변하는 필요 물들에 의해 내일 그릇된 것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달리, 우리는 인간의 경험의 산물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성경에서 진리와 행위 둘 다에 대한 우리의 표준을 발견(we find our standard)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짧은 이야기에서 생각하고 있는 첫 번째 가능한 관점(view)을 거절한다. 우리는 경험을 우리의 표준으로 삼는 것을 거절한다(We reject experience as our standard).
복음뉴스 2022.06.25 18:51
[각주] 미국 실업가, 금융가 존 D. 록펠러 주니어(John D. Rockefeller Jr., 1874-1960, 침례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회원 중 하나)는 뉴욕 맨해튼의 모닝 사이드 하이츠 지역에서 리버사이드 교회(나중에 미국 침례교회와 연합 그리스도교회 교단회원)에 자금을 지원했다. 1930년 10월, 문을 열자마자 헤리 에머슨 포스딕(Harry Emerson Fosdick, 1878-1969) 목사직으로 부름 받았다. 1930년 10월 6일 자 <TIME>지(紙) 커버를 장식하였다.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며 광대한 규모로 그는 지역 사회 교회 체육관, 연극을 위한 회의실, 식당, 22층 건물의 10층짜리 종탑 등, 그는 인종주의와 불의에 반대하였지만, 유신론적 진화론을 옹호하였으며, 그는 모든 학교에서의 진화론을 옹호하고 창조론을 거부하였다. 그것에 대한 자세한 논쟁의 칼럼은 1951년 메이첸의 저서 중의 하나인  J. G. Machen, 이민철 역(譯) 『기독교란 무엇인가』 What is Christianity? (New York, N.Y: New Cross Press, 2019), 제 14장 성경의 현대적 사용, pp. 269-296. 참조.

* 2022년 6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13호에 실린 글입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362 [유재도] 어떻게 예수님이 교사로 인정받으셨는가? 복음뉴스 2022.10.07
361 [이민철] 진리 위에 세워진 삶 (2) 복음뉴스 2022.10.07
360 [김현기] 카메라 선택 복음뉴스 2022.10.07
359 [한준희] 알고 있어야 할 교회론 (4) - 교회가 가지고 있어야 할 방향과 성격 복음뉴스 2022.10.07
358 [조희창] 눈물이 멈추지 않아 혼났습니다 복음뉴스 2022.10.07
357 [오종민] 당신은 어떻씁니까? 복음뉴스 2022.10.07
356 [양춘길] 답사 복음뉴스 2022.10.07
355 [박시훈] 모든 상황 속에서 복음뉴스 2022.10.07
354 [김혜영] 그러므로 복음뉴스 2022.10.07
353 [김용복] 아들 옷 입은 아버지 복음뉴스 2022.10.07
352 [이철수] 치매 복음뉴스 2022.10.07
351 [박인혜] 차를 마십니다 복음뉴스 2022.10.07
350 [배성현] 내 영혼의 갈증 복음뉴스 2022.10.07
349 [임현주] 주님의 정원 복음뉴스 2022.10.07
348 [양희선] 알아야 믿지! 복음뉴스 2022.10.07
347 [김동욱] 바꾸어 주시고, 고쳐서 쓰시는 하나님 복음뉴스 2022.08.13
346 [강유남] 성전과 교회 복음뉴스 2022.08.13
345 [이종식] 목회 중에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대하는 지혜 복음뉴스 2022.08.13
344 [이윤석] 예수님의 인격을 신뢰하라 복음뉴스 2022.08.13
343 [김정호] 한미수교 140주년에 영적동맹을 생각한다 복음뉴스 2022.08.13
342 [조원태] 갈렙 형에게 복음뉴스 2022.08.13
341 [김경수] 죄책감을 치유하라(2) 복음뉴스 2022.08.13
340 [조진모] 회심한 한 사람의 영향력 복음뉴스 2022.08.13
339 [유재도] 예수님은 과연 최고의 교사인가? 복음뉴스 2022.08.13
338 [정관호] 성도교제, 어떻게 할 것인가? 복음뉴스 2022.08.13
337 [한삼현] 다신교 숭배의 세계에서 유일 신앙 복음뉴스 2022.08.13
336 [이민철] 진리 위에 세워진 삶 (1) 복음뉴스 2022.08.13
335 [한준희] 하나님나라와 교회와의 관계 복음뉴스 2022.08.13
334 [김현기] 비디오 스위쳐에 대한 이해 복음뉴스 2022.08.13
333 [김혜영] 토끼풀을 뽑으며 복음뉴스 2022.08.13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