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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준희] 창세기 1 : 1

복음뉴스 0 2022.04.05 21:09

신준희 목사가 읽어주는 창세기 이야기 ① 창세기 1 : 1

글 : 신준희 목사 (트리니티 가정교회) 


복음뉴스 편집자의 원고 청탁과 부드러운 독촉을 이번만큼은 비껴갈 수 없었다. 무엇을 쓸지 이리저리 고민되었다. 단순히 녹취로 풀어 낸 지상 설교로 때우고 싶진 않았다. 성경 연구나 묵상시 성경 각 권의 시작 부분이 설교 작성에 매우 인상적이었던 경험이 있다. 대체로 성경의 서두가 그 성경의 전체 주제를 지배했다. 갈라디아서 초두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강조하며 늘 복음의 자리로 돌아갈 것을 강조했다. 에베소서에서는 이 속된 세상에 살면서 어떻게 ‘신실한 자’로서 살아야 할지에 집중하고 있다. 모세 오경은 히브리어 본문이 시작되는 첫 단어가 그 성경 제목이 되었다. 그만큼 시작이 중요하다. 

 

‘창조와 타락’이 담긴 창세기 서언과 첫 주요 단락들에 대한 관심은 그래서 시작되었다. 첫 번째 성경의 시작, 그것도 성경 전체의 시작이랄 수 있는 창세기 첫 대목은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가? 모세는 창세기의 장엄한 초두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가? 근자에 창세기 시작 부분을 다룬 설교를 접할 기회가 없었다. 모든 것의 기원을 밝히는 본문을 주제로 한 설교를 찾기란 점점 어려워진다. 정형화된 ‘무로부터의 창조(ex nihilo)’ 교리를 당연스레 간과해서일까, 아니면 진화론(evolutionism)과 싸우기 버거워서일까, 아니면 지금까지 알려진 과학적 발견과 창세기 기록들간의 간극을 도무지 설명하기 힘들어서일까. 혹 찾는다 하더라도 대개가 요점에서 벗어나거나 창세기와는 무관한 이슈들에 관심을 둔다. 그나마 성경공부시 논쟁과 시비거리를 붙들고 씨름하지 않는다면, 아예 침묵하고 만다.

 

‘한 처음의 이야기’의 핵심에 해당하는 창세기1:1-4:26 본문은 지면이 허락하는 한 본 섹션에서 ‘설교 [이야기]’ 형태로 다루게 될 것이다. 시드니 그레이다누스(Sidney Greidanus) 교수가 도처에서 누누이 강조한대로, 구약 본문은 당시 청중에게 전달된 메시지를 담은 설교 이다. 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우리가 제대로 읽으려면 일관되게 본문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물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그 본문이 왜 그렇게 기록되었는지 살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삶과 관련하여 하나님, 이 세상, 그리고 우리들 자신에 대해 성령께서 긴급히 전하려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궁구해야 할 것이다. 결국 본문이 말하는 내용이 이럴 것이라는 내 생각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끄집어 내는 작업에 충실해야만 이 모든 설교 작업들이 가능할 것이다. 바른 독해, 바른 해석이 필요한 까닭이다.

 

오늘은 창세기 1:1을 살펴보기로 하자. 참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는 이 창조기사의 첫 문장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태초에 (In the beginning)’ 라는 첫 어구를 대할 때 무슨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 과거에 ‘태초’가 있었다는 이 주장은 우주가 영원하다고 보는 다른 여타 세계관들과 창세기를 확연하게 구분해준다. 서구에서는 한 때 ‘빅뱅’ 이론으로 대체되기 전까지 ‘정상상태론’ (the steady state theory, ‘물체 의 운동 상태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 상태’)’에 입각하여 우주를 보았고, 동양에서는 시간(時間) 을 ‘방향성 없이 영원히 순환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창세기는 우리가 거주하는 이 우주에 한 처음의 ‘태초’가 있었음을 강조한다. 우주의 시원인 절대적인 ‘ 태초’가 있었다고 한다면 우주의 역사를 원(圓)이 아닌 선 (線, linear concept)으로 보아야 타당할 것이다. 그 말에는, 우리의 우주가 어떤 목적성을 띠고 있고, 그 안에 사는 우리의 인생 역시 어떤 방향성과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함축 한다고 하겠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의 표현이다. 창세기1:1 은 하나님께서 우주를 존재케 하셨다 주장한다. ‘천지 (the heavens and the earth)’란 말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보 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을 함축하는 저자의 의도적인 표현이다. 그것은 밑도 끝도 없는 이 광활한 우주에서 어느 특정한 곳/장소를 지목하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만드셨다는 표현이다. 끝없이 펼쳐지는 셀 수 없는 우주들, 블랙홀, 지구, 열대우림 지역, 곤충, 당신과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 등 온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함의하는 표현이다. 하나님은 유물론자들이 말하는 인간이 만든 상상력의 결과물이 아니라, 인간인 우리가 바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결과물이란 말이다.

 

히브리어에서 ‘창조하다 (created, bara)’라는 동사는 항상 그 행위의 주체자를 담고 있는 표현이다. 영국의 유명한 구약학자 알렉 모티어(Alec Motyer, Look to the Rock, p. 67 참 조)는 구약성경에서 ‘창조하다’라는 동사 표현의 독특성을 언급했다. 모티어에 따르면, ‘창조하다’는 동사는 이것이 가리키는 주어가 명시적이든 암시적이든 간에 항상 하나님을 그 주체로 지목한다. 구약에서 이 표현이 특별하거나 아니면 어떤 새로운 행위나 사건을 수반하는 동사로 사용될 때 항상 그 주체는 하나님이다. 바로 이 표현이 창세기 1:1에서 사용된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창조기사에서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강조하는 21절(생명의 창조)과 27절(인간의 창 조)에서도 사용되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대부분 ‘만들다 (made)’라는 동사가 사용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무언가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행위를 드러내신 것을 뜻한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창조 행위는 단순히 무엇인가를 개조하는 행위 이상을 의미하며, 또한 무엇인가를 존재하도록 만드는 원리들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지금의 우리도 하나님의 창조 로 존재한다는 사실’)

 

여기서 잠시 자연스레 야기되는 질문 한 둘을 살펴보자. ‘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하면, 그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을까?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하나님은 ‘태초에’ 이미 존재하신 분이시다. 그 분은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으로, 지음 받은 분이 아니다. 이 궁금증은 굳이 우리가 대답할 필요가 없는 질문이다. 이 말도 안 되는 소리 집어 치우라 할지 모르겠지만 한 번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존재를 부 인하는 사람들도 자신들만의 고안해 내지 않는 영원한 어떤 것 - 그것이 물질이든, 에너지이든, 혹은 자연법칙이든 - 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진 못할 것이다.

 

‘일찍이 하나님이란 존재가 계셨고, 그 분이 이 모든 만물을 만드셨다’고 하자. 그러면, 창세기에서는 이 사실을 어떻게 증명하고 있는가? 물론 중세 토마스 아퀴나스가 논증과 추론을 통해 하나님 존재 증명을 다양하게 시도했지만, 아쉽게도 창세기는 이러한 증거와 증명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보인다. 오히려 창세기는 창조 사실에 대한 입증 보다는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다. 창조기사는 하나님을 증명해 주는 지문(fingerprints)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 그 분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다.

 

창세기는 창조주를 위한 증거들을 찾기 보다는, 인간 자신을 위해서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기를 고대 한다. 이것은 우리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창조론에 입각한 하나님 존재 증명을 한답시고, ‘위대한 건축가’니 ‘궁극적 존재’니 라는 애매모호한 개념을 원용하여 하나님의 증거들을 찾는 데 혈안이 된 나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더욱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막상 궁금증에 대한 해결은 커녕 그냥 답보상태에 머문 꼴이 되고 만다. 목적을 위한 수단에 지나치게 집착하다 정작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본말이 전도된 꼴인가! 이것이 우리 영혼에 무슨 유익을 가져다 주겠는가. 그래서 창세기는 거두절미하고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만을 만나도록 하는데 온통 관심을 기울인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가르침이 그저 이론적인 진리가 아니라면, 이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 삶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와야 하는가? 성경이 창조 사건을 호소하는 본문을 살펴봄으로써 몇 가지 적용점을 살펴보자. 무엇보다, 창세기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소중히 여길 것을 강조한다. 잠언8:22, 24, 27와 이어지는 잠언 8:32-33을 읽어 보라. 잠언 저자는 하나님의 지혜를 찬양하며, 그 지혜를 구할 것을 촉구한다. 잠언서 본문에서는 지혜를 언급할 때 하나님의 창조 사건에 호소하고 있다. 전자의 잠언 구절이 말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지혜로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이다 [지혜를 의인화시킨 이 대목에 대한 기독론적 해석은 차치하고 보자]. 하나님의 지혜의 탁월함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어지는 후자의 잠언 구절은 하나님의 가르침[훈계]을 듣고 [행함으로써] 지혜를 얻을 것을 명한다. 하나님의 지혜가 진정 참된 지혜인 까닭에, 잠언은 우리가 그것에 귀 기울일 때 유익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잠언서에서 말하는 ‘창조의 지혜’를 지닌 하나님은, 다른 성경 본문에서도 여전히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과 동일한 창조의 하나님이시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만든 동일한 지혜에 쉽게 다가갈 수 있다. 따라서, 너무 단순화시킨 듯 들릴른지 모르겠지만, 성경 말씀을 ‘창조자의 가르침 [훈계]’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하겠다. 성경 말씀에 귀 기울임으로써 만물의 창조자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실로 대단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창세기에서 하나님을 인간에게 소개할 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엄연한 관계’가 설정되어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과 인간은 전혀 동등한 관계가 아니다. 하나님은 그야말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런데 우리가 누구길래 감히 그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바로 이 점이 이사야 선지자가 동시대인들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었던 주지의 사실이다. 이 점은 교만으로 가득한 우리 인간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어야 할 교훈이다. 이사야 45:11-12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왈가왈부 논쟁을 일삼으며, 심지어 자신들이 하나님 보다 더 잘 안다고 까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들을 포함한 천지만물을 자신의 명령으로 창조하셨다고 일갈하신다.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심을 온전히 파악할 때야만이 인간은 자신의 본래 자리로 되돌아 갈 수 있다. 어찌보면 하나님과 우리 인간은 상종할 수 없는 ‘창조주-피조물’과의 관계다. 그런 하나님을 우리가 대하게 될 때, 우리는 마땅히 겸손, 존경, 경외심으로 그 분을 대해야 할 것이다. 창세기 1:1은 하나님의 본연의 위치가 어디인지 확실히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본연의 자리 또한 어디인지도 명확히 가르쳐 준다.

 

세째로, 창세기의 창조 사건은 ‘하나님-우리’가 처한 엄연한 위치와는 달리, ‘하나님-우리’ 사이에는 어떤 긴밀히 관계가 조성되어 있음을 가르친다.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있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궁궐 시위대 뜰에 갇힌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한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께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 (렘32:17). 예레미야는 자신의 암울한 상황에 맞서 창조주 하나님을 떠올린다. 하나님이 온 우주를 만드신 창조주시라면 그 어떤 일인들 그 분께서 못하실 일이 있겠는가? 가장 위대한 기도 비결은 우리의 기도 대상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놀라운 특권은, 예레미야처럼 우리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분과 긴밀한 언약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기도드리는 분이 갖고 계신 힘과 능력을 한번 생각해 보라. 우리가 당면한 문제 가운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해결치 못할 문제거리라도 있을까?

 

끝으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사실은 ‘상자 속의 하나님 (God in a box)’을 거부한다. 사도행전 17장에서 우리는 1세기 아테네 광장에서 설교하는 바울을 볼 수 있다. 그의 청중은 식자층으로 매우 종교적이었지만, 무엇인가 아주 잘못된 사조에 빠져 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모든 것]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사도행전17:24-25).

 

아테네 종교가 범하는 오류는, 자신들이 주문 제작한 신당이나 예배 처소 같은 곳에 신을 가둬 놓고, 스스로를 건사하지 못해 시중들어 줄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바울은 참되시고 살아있는 신은 모든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그 신은 우리의 도움이나 보살핌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우리가 그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처지이다. 실제로, 우리의 내쉬어야 할 다음 호흡과 숨결은 그 분에게서 온다. 그는 모든 만물의 주님이시기에 전혀 ‘상자 속에 [가둬 놓은] 신’이 되실 수 없다. 그 분만이 모든 만물에게 생명과 숨결과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하나님을 성소나, 아니면 우리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신으로 한정시키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꼭 어느 특정 장소에 가서 기도해야만 한다고 느끼거나, 교회에다 꼭 무엇인가 헌금이나 헌물을 바쳐야만 자신에게 은혜를 부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하나님이 모든 만물의 창조주시라고 한다면, 상황은 완전 그 정반대이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천지 모든 만물을 지으신 분이시기에 온 우주가 그 분께 속해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 점은 모든 만물과 모든 사람들에 대한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말해준다. 바울은 아테네 시민들에게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나님이 모든 만물의 창조주란 사실을 모르는 문화에서는, ‘너에겐 너의 방식이 옳고, 나에겐 내 방식이 옳아’라는 주장에 아주 쉽게 수긍한다. 창세기 역시 수많은 종교/신앙이 가득한 세계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이 점을 분명히 해 두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창세기1:1은 모든 만물과 모든 사람들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신, 살아 계신 창조주 하나님 한 분만이 유일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도록 해준다.

 

[편집자 주 : 이 글은 2021년 6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창간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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