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신문

 

[이윤석] 요한복음을 주신 이유 - 요한복음 20장 31절을 중심하여

복음뉴스 0 2022.04.06 10:26

이윤석 목사의 요한복음 살펴보기 ① 요한복음을 주신 이유 요한복음 20장 31절을 중심하여

글 :  이윤석 목사 (NY 부르클린제일교회)

 

<들어가며>

 

이제 요한복음을 살펴보기를 진행함에 있어 필자는 믿음의 위대한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선배들의 글과 신학 서적 몇 가지를 참조하되, 글의 성격상 출처나 인용부호 없이 사용하고자 합니다. 또한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신학신약 과정에서 요한복음을 집중하여 조사해보았던 내용을 기초하여 비교적 간단하고 쉬운 설교 형식으로 바꾸어 전달하 고자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말씀이 복음서이며 그 중에서도 요한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 복음이 모두 우리 주 와 구주되신 예수님의 모습을 말씀하시지만, 그 중에서도 요한복음은 특히 적용의 측면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주님의 모든 모 습과 우리 그리스도와 관련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1. 왜 요한복음을 기록하여서 주셨을까요?

 

1) 준비를 위해서였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주님은 사역의 막바지에 이르러 장차 자신없이 살아가야 할 제자들을 준비시키는데 더욱 많은 시간과 관심을 쏟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을 기록하여 주신 직접적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또한 성령의 오심을 기대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성령에 대한 교리를 많이 가르친 성경입니다. 요한복음은 마지막 복음서이 며, 무엇보다 어느 정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온 사람을 대상으로 쓴 것입니다. 요한은 문필가가 아니며, 글쓰기를 좋아해서 생업으로 삼은 사람도 아닙니다. 성경기자들이 그렇지만 모두다 현실적인 사람들이었 습니다. 사도와 교사로서 절실한 필요성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감동하심으로 복음서와 편지를 쓰게 하셨습니다.

 

3) 그러므로 이 말씀을 기록한 이유는 매우 분명한데, 그것은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힘을 주고 격려하기 위해서입니다.

 

4) 환경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먼저는 주님의 오심이 지연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위대한 구원 사역을 마무리 짓고 역사에 종지부를 찍으실 날, 그의 나라를 시작하실 날이 온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오시지 않았기 에 그 때문에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메시지를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이 믿는 큰 약속과 복스러운 소망(딛2:13)이 이루어 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혼란을 겪는 그들에게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5) 또한 거짓 가르침을 밝혀 참된 진리를 세워 주시기 위해서 썼습니다. 당시에 거짓 가르침이 나돌고 있었습니다. 거짓된 가르침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位格)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 핵심적인 교리는 기독교의 근본적이고 중심적 교리입니다. 요즘에도 “나사렛 예수는 인간일 뿐이지”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현대적이고 과학적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의식인 것처럼 말하지만, 그러나 그런 것은 1세기에 이미 나왔던 주장입니다. 오늘날 어리석은 자들은 주님과 구약 성경에 대해 잘못된 주장을 하면서도 아주 똑똑하고 수준이 높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어리석은 주장은 성경 역사만큼 오래되었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학식이 높고 엘리 트적인 사람이 아니고 오히려 앵무새가 반복하는 말처럼 의미없는 말일 뿐입니다!

 

이런 거짓된 가르침이 두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육신한 것처럼 보였을 뿐이지, 진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 보였을 뿐, 일종의 허상이였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을 신학적으로 말하면 가현설(假現說, Docetism)이라고 합니다. 둘째 그들은 인간에 불과한 나사렛 예수가 세례를 받았을 때, 영원하신 아들 그리스도가 내려와 인간 예수 속에 들어가셨고, 십자 가에 못 박히기 전까지 그 몸에 머무셨으나, 죽으시는 그 순간 그리스도는 그 몸을 떠나셨기 때문에 결국 참 인간일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거짓된 가르침을 사도 요한은 분명히 밝혀야 했고, 그래서 바른 교정과 전달을 위해서 이 복음을 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더하여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할 당시(주후 90년 정도)에 외경 복음이 많았습니다. 이런 저런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생애를 기록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그런 책으로 인해서 혼란에 빠졌습니다. 얼마 전에도 [다빈치 코드]라는 영화로 인해서 도마복음의 열풍이 불었던 적이 있습니다. 또 [인도에 가신 예수], [석가모니와의 대화]와 같은 책들이 시중에 나와 기독교인들을 혼란케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날조되고 왜곡된 가짜일 뿐, 성도라면 이런 책들은 읽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바로 이 성경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외경복음은 절대로 성경을 보완해 주지 못하며, 오히려 훼손하며, 그 모든 것이 인간이 상상해 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6) 이것은 비신자에게 쓴 것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확신을 주고 올바로 세워주기 위해 기록된 책입니다.그 당시 사람들에게 몰려 왔던 무력 감, 불행감, 혼동, 절망감에서 건져주기 위해 기록한 것입니다. 혼란에 빠져 침체되어 있는 신자들의 상황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 요한이 썼습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기독교인의 삶이 똑같은 형편에 있기 때문입니다. 확신을 잃어버리고 침체에 빠져 불행하게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충만한 삶을 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말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런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사랑의 안목으로 바라보면서 ‘대체 이들을 어떻게 도우면 좋을까?’ ‘이들에게 정확하게 필요한 메시지기 뭘까?’를 자문하며 깊이 묵상할 때 성령께서 그를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2. 그러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도 요한이 한 일은 무엇입니까?

 

1) 사도 요한은 일반적인 위로의 편지를 쓰지 않았습니다.어쩌면 위로만의 메시지가 현대 교회가 죽어가는 요인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습 니다. 물론 궁극적인 의미에서 교회는 위로를 주고 있고, 오직 교회만 위로를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단순히 상냥한 곳이거나, 그리스도인들이 친절한 사람들인 것은 아닙니다. 설교자들은 교회를 찾은 사람들을 좀 더 편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인가요? 그런데 요즘은 상당수의 설교자들이 그렇게 변질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사실상 그렇게 적응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오거나 감동을 받지는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무엇이 문제일까요? 교회가 보여주는 모습 때문에 교회에 오지 않거나 머무를 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감상적이고 감정적인 위로를 원하는 친절함으로 세워진 교회라면 그런 교회는 기독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진단하고 밝히 드러내어. 견고한 진리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절실한 것들을 필요로 하는데,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그들이 발견하는 모습은 무엇입니까? 물론 사람들은 먼저 칭찬과 위로와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말을 들으려고 교회를 찾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임무와 역할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것을 인도할 책임이 있는 것이 설 교자요 교회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사도요한은 일반적인 위로의 말이나 호소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가 직접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 이라고 가르칩니까? 이것이 요한복음을 주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하려 함이니라”(요20:31).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인을 위해서 기록된 책이라면, 왜 믿고 있는데 왜 또 믿게 하려고 쓴다는 것입니까? 문제가 무엇인가요? 요한의 의도는 “너희가 참으로 믿게하기 위해 참으로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되,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고 나는 쓴다” 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분명 생명이 있지 않습 니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물론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생명과 어른의 생명은 다른 법이며, 또한 건강한 어린아이의 생명과 병으로 쇠약해진 어린 아이의 생명도 서로 다릅니다. 겨우 숨은 쉬며 뼈와 가죽만 남은 어린 아이를 보면서 기뻐하거나 자랑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아이를 보면서 살아있고 생명이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생존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 아이는 결코 그렇게 되지 않았어야 정상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건강을 잃고 병든 교회를 회복시키고자 이 책을 쓴 것입니다.

 

2) 또한 사도 요한이 이를 위해 사도로서 할 일은 정확하게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무엇을 가르쳤습니까? 먼저는 그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교리를 가르칩니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런 분이기에 우리에게 가능해진 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칩니다. “너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라고 전해주는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을 기록한 이유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일도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우리 기독교가 이제껏 인류와 문명이 경 험한 모든 것들 중에 가장 놀랍고 영광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이 되면, 모든 것이 새로워지고, 변화되며 달라진다는 것, 구원받고 해방되어 자유로워진다는 것, 능력과 영광으로 충만해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실제로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사도 요한은 고백합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 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16).” 우리도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를 받으면서 은혜가 더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지금 세상은 마치 불타며 절망에 빠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모습입니다. 심지어 기독교인이라고 스스로 고백하는 사람들마저 그 속에서 함께 헤매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왜 우리만 보고 기독교 전체를 판단하느냐고 비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인 우리자신들이 바로 기독교의 대변자요 신앙의 수호자요 관리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보고, 기독교 메시지를 판단하는 것은 지극히 합당한 일입니다. 이런 것을 어찌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3.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인의 모습은 어떠하며 무엇이 필요한가요?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도대체 침체된 그리스도인들이 왜 그렇게 많습니까? 약간의 좋은 기분이나 격려나 공감을 얻기 위해 교회 찾는 교인이 왜 그리 많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상기키시며 재촉하고 강요해야만 겨우 형식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왜 그 렇게 많을까요? 신앙을 의무로 여기면서 고작 교회에 출석하는 것만 자랑스러워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런 것은 가짜 기독교인에 불과 하며 완전히 잘못된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1) 먼저 우리 기독교인의 모습은 성경의 초대교인들과 같아야 합니다. 많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복음에서 발견한 사실 때문에 가족이나 친지나 사랑하는 이들에게 배척당하는 고통을 기꺼이 감수했습니다. 그들은 박해와 투옥과 순교 위협 앞에서도 하나님을 위해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겨주시는 것에 감사드렸습니다. 주를 위해 죽는 순교를 최고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그렇지만 바로 이런 정신이 고대세계를 정복했고 기독교는 이렇게 확산되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런 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막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세상이 올 때, 우리 역사의 한 시대, 우리가 살았던 이 악한 시대에 과연 무엇을 나타내고 전했는지에 대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 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으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날은 더 가까웠습니다. 우리는 많은 이들이 복음에 주목할 수 있도록 무엇을 했습니까? 우리는 복음과 복음의 본질과 관련하여 어떤 모습을 보여주었습니까? 우리는 이것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는 위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복음이 필요합니다. 위로도 필요하지만, 복음의 위 로는 직접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통해 간접적으로 오는 결과입니다. 설교자의 주된 임무는 사람들을 위로하는데 있거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자의 임무는 가장 친밀하신 형제와 같으신 그리스도 예수께 이끌어 가는데 있습니다. 설교자가 만일 위로만 준다면, 그것은 마치 고통을 경감시켜려고 마약을 주는 것과 같습니 다. 이 시대는 심리학으로 설교하는 분들이 인기가 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 공포, 불안, 불면증을 극복하는 심리적 방법과 치료방법을 말합니다. 그들은 진정제를 투여합니다. 일반적인 위로를 주는 막연한 심리학적 이야기를 통해 흐뭇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게 해주고 잠이 잘 들도록 도와주는 이야기를 해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설교자로서 정직하기 못한 것입니다. 복음이 아니라 심리학에 불과한 것입니다. 복음의 임무는 결코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은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약간의 심리학적인 권면을 하지 않았습니다.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위로를 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독교 설교의 역할도 목적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설교자와 기독교인의 모든 활동은 주님의 진리의 말씀을 깊이 깨닫는데서 나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4. 그러면 요한복음이 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을 어떻게 제시합니까?

 

1) 한 마디로 말하면 가르침 혹은 교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설교자나 성경을 이해하려는 자들은 개개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할 것이 아니 라, 그 모든 문제의 궁극적인 원인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타난 각각의 문제는 크고 중심적인 질병의 여러 증상에 불과하기 때문입 니다. 요한은 “너희 형편과 처지가 어떤지 잘 안다. 이런 저런 것 때문에 흔들리는 것을 안다. 시련과 환난으로 낙심에 빠진 것도 잘 안다. 나는 너희를 돕고 싶다. 그래서 이 말을 하고자 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요1:1).” 이것이 문제를 다루는 요한의 방식이요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이것이 개혁과 부흥으로의 첩경입니다. 설교자는 이것을 가르쳐야 하고 기독교인은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와 사람들의 문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진정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을 따라 복음대로 믿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충분히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그분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무슨 일이 가능해졌는지를 충분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하려 함이요(요20:31)”라고 말씀합니다. 이 복음서를 쓴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 대한 교리를 알려주기 위해서 였습니다.

 

2) 또한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것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2)”라는 말씀입 니다.이것이 매우 중대하고 객관적인 교리입니다. 요한이 하고자 하는 말은 이렇습니다. “그렇다 나는 이론적인 지식으로 너희 머리를 채우기 위해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과 교리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 교리로 너희가 생명을 얻길 바란다.“ 지식과 생명은 함께 가는 것이요, 교리와 경험도 함께 가는 것이며, 이해와 매일의 실천도 함께 가는 것입니다.

 

지식과 삶이 나뉘는 순간, 우리는 길을 잃게 됩니다. 오늘날 이 두 가 지가 분리되지 않았습니까? 어떤 분들은 교리의 객관성과 신학을 전적 으로 강조하는데, 삶으로 보여주는 바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보고 싶어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매일의 삶에 실제로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신앙을 가진 자들의 삶에 과연 생명이 나타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실천만 강조하고 신앙의 지식은 배척합니다. 즉 삶과 경험에만 전적인 강조점을 둡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관적으로 치우쳐 항상 자기 내면만 들여다보며,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을 요구합니다. 우리 시대는 심리학의 시대이며 주관적으로 치우쳐 항상 자기 내면만이 중요시 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인간 자아가 우주의 중심으로 되어있다고 오인하여 믿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식과 삶이 분리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임을 알고 믿는데 그치지 말고, 삶으로 그 증거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 영혼과 일상생활과 행동 속에서 약동하는 하나님의 생명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그렇다. 바로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나는 이 복음서를 썼다”라고 말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교리에 반감을 느끼며. 너무 어려워서 이해할 수 없다고 불평합니다. 대부분 십오 분 쯤 되는 기분 좋은 강연을 기대합니다. 메스컴은 세상을 바꾸는 시간이 십오분이라는 생각을 주입하는 듯 합니다. 그래서 십분 분량의 장식이 잘된 유투브를 만드는 사람들이 아주 인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삶은 고달파요 단순하게 말씀해주세요. 느끼게 해주세요!”라고 하소연하고 있으며, “나에게 도움이 되면 믿겠어요! 제가 원하는 바를 주세요“라고 요구합니다. 진정한 성도라면 그렇게 요구하며, 참 설교자라면 오직 이런 요구에 적응하여 말씀을 전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신약성경은 오히려 그런 태도를 계속 정죄합니다. 신앙의 기본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삶 전체가 어그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 기 때문에 가르침은 반드시 신약성경의 교리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2천 년 전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이 노예와 종으로 힘들게 살아가던 사람들입니다. 더구나 박해와 죽음에 직면해 있던 성도들에게 요한은 말합 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2).”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이처럼 수준 높고 고상한 교리를 전하다니 이것은 적응력이 부족한 부적절한 이야기인가요? 아닙니다. 신약성경의 모든 서신서들은 그 렇게 하고 있습니다. 먼저 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이 우리의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이것을 먼저 알려고 하지 않고 당장에 사용할 수 있는 경험적인 것을 원함으로 말씀을 많이 듣는 것 같지만, 무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주된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우선적인 문제는 주관적인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 신앙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교리에서 생명이 나오고 체험이 나오며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 행하려는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먼저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주 예수님, 이 복되신 분으 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구주시며 구원이시며 모든 것이십니다. 우리가 받는 은혜 위의 은혜는 오직 다 그의 충만한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리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3) 그러면 왜 예수께서 하나님이셔야 하고, 인간이셔야 한다는 이 교리가 필요합니까?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주님이 하나님만 되신 다면, 어떻게 나를 대표하실 수 있을까요? 우리를 이해하며, 우리 짐을 지고 하나님 앞에 대표로 나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의 대표자도 인간이셔야 합니다. 또한 사람은 시험을 받을 때나 연약해져 있을 때 도와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분은 어떤 분이라고 말씀합니까? “그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주님은 우리가 겪고 당하는 일을 똑 같이 겪고 당하셨습니다. 만일 참 인간이 아니셨다면 대제사장으로 나를 불쌍히 여기시며 위로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리는 중요하지 않고 내 삶에 도움과 해결이 되면 된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입 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주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정확하게 그가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고 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왜 그런가요? 내가 그리스도 교리를 정확하게 알지 못할 때 완전히 어긋난 길로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요? 내 개인의 아픔이나 고통, 불면증 같은 문제는 그만 잊어버립시다. 내가 알야야 할 유일한 한 가지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하는 것입니다.

 

4) 그래서 요한복음이 어떻게 시작되는가를 살펴볼까요? 먼저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라고 선포하며 시작합니다. 이 복음을 받았던 사람들은 매일 가장 바쁜 노예들이었지만 그들은 이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도 여기에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영원한 삶을 소중히 여 기고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소중히 여긴다면 이 교리들을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독생자라고 시작합니 다. 예수님은 피조물이 아니라, 인간인 동시에 말씀이십니다. 하나님을 나타내주시고 계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말씀합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1:2).”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라고 시작합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1:3).” 만물의 최종 기획자는 성부시며, 성자는 창조의 실행자이심을 선포하여 가르칩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1:2).” 넷째 는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영적 생명과 빛과 지각의 원천이심을 증거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4,5).” 이분 없이는 영적인 생명도 없으며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영혼의 영원한 생명도 얻을 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17:3)”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며>


요한복음에서 주고자 하는 영생은 일차적으로 체험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영접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신앙은 자신이나 자신의 체험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집중하여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에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면, 요한복음 첫 장이 말씀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하나님, 영원한 말씀, 창조주, 모든 영적 능력과 생명과 삶의 원천자라는 것입니다. 이런 분이 세상에 우리 위해 오셨다는 것이 바로 복음 메시지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고 있 으며 그 믿는 바를 제대로 깨닫고 있습니까? 예수는 복되신 제 2위이신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 품 속에 계신 독생하신 하나님이시다(1:18).” 그분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셔서 거하시고, 하늘로 가셨고 구원하려 곧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믿고 깨달아야 할 분명한 복음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오늘도 나는 날 붙들어주실 존재가 필요하며, 나를 구원해 주실 존재가 필요합니다. 오늘도 내 속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실 존재가 필요한데, 그 존재가 여기 계신 분입니다. 모든 것의 원천이 되시는 분,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 여기 계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분이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준 요한의 위로며, 오늘도 우리의 모든 상황에 합당한 유일한 위로이십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요한복음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진심으로 믿습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뜨겁게 살고 있지 못합니까? 왜 불타오르지 않습니까? 왜 기뻐 뛰며 자랑하지 않습니까? 왜 그 생명을 나타내지 못합니까? 왜 놀라움과 사랑과 찬양에 사로잡혀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런 사실들을 알면서 덤덤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자기 이야기는 그토록 많이 하면서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안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 질문에 분명히 대답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믿고 깊은 곳에서부터 떨린 적이 없는데도 믿는다고 할 수 있 습니까? 이제 예수 그리스도만을 집중하여 바라보고 영접하여 모십시다. 그러면 새로운 생명, 생명다운 생명, 영원한 생명으로 충만해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위로요 우리에게 필요한 도움입니다! 요한복음을 주신 이유를 알고 체험하며 풍성한 생명을 소유하는 독자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편집자 주 : 이 글은 2021년 6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창간호에 실린 글입니다]       

 

ⓒ 복음뉴스(BogEumNews.Com)

Comment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122 [강유남] 진리란 무엇인가? 복음뉴스 2022.04.11
121 [김현기] 말하는 대로 노래하는 보컬 선생님, 레이첼 황 복음뉴스 2022.04.10
120 [이종식] 성경적으로 목회를 하려고 노력하면 길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된다 복음뉴스 2022.04.10
119 [권캐더린] 제발 살려주세요!! 복음뉴스 2022.04.10
118 [조희창] 버지니아에서 있었던 뜻있는 만남 복음뉴스 2022.04.10
117 [오종민] 이 또한 지나가리라! 복음뉴스 2022.04.10
116 [김혜영] 또 한번 그러나 마지막 기회 복음뉴스 2022.04.10
115 [이민철] 메이첸 박사 저 <근대세계 안에 그리스도인 신앙> - 현재의 비상상황과 그것을 해결하는 길 복음뉴스 2022.04.10
114 [유재도]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복음뉴스 2022.04.10
113 [문갈렙] 살리는 사랑, 살리는 말, 살리는 기도 복음뉴스 2022.04.10
112 [한삼현] 믿는 자는 그 마음을 은혜로써 강하게 함이 좋고 식물로써(제의적인 음식규례로) 굳게 하지 말라 복음뉴스 2022.04.10
111 [김일영] 넘치는 감사를 하나님께! 복음뉴스 2022.04.10
110 [주영광] 광야를 지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복음뉴스 2022.04.10
109 [김동욱] 회한(悔恨) 복음뉴스 2022.04.10
108 [한순규] 러브 뉴저지 힐링 캠프를 다녀와서 복음뉴스 2022.04.10
107 [배성현] 십자가 - 죽음 보다 강한 사랑 복음뉴스 2022.04.10
106 [양희선] 때때로 종종 그리고 은혜 복음뉴스 2022.04.10
105 [김용복] 거지 옆 자리 복음뉴스 2022.04.10
104 [이윤석] 율법은 하나님을 알려준다 복음뉴스 2022.04.10
103 [양춘길] 나부터 시작 복음뉴스 2022.04.10
102 [한준희] 주일 성수 복음뉴스 2022.04.10
101 [강유남] 천국 복음 복음뉴스 2022.04.10
100 [김현기] 하나님과 동행하는 작곡가, 김유신 집사 복음뉴스 2022.04.10
99 [이종식] 목사가 이 땅에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성장시키려면 무엇에 가장 힘을 써야 할까? 복음뉴스 2022.04.10
98 [권캐더린] 사랑한다... 복음뉴스 2022.04.10
97 [조희창] 론 할아버지가 들려주신 이야기 복음뉴스 2022.04.10
96 [오종민] 희망을 주는 말 한 마디 복음뉴스 2022.04.10
95 [김혜영] 오늘의 에덴에 살고 싶다 복음뉴스 2022.04.10
94 [유재도] 담대하라 복음뉴스 2022.04.10
93 [문갈렙] 가라, 행하라! 복음뉴스 2022.04.10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