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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석] 율법과 은혜의 관계(1) 요한복음 1장 17절을 중심하여

복음뉴스 0 2022.04.09 08:41

이윤석 목사의 요한복음 살펴보기 ③   율법과 은혜의 관계 - 요한복음 1장 17절을 중심하여

글 : 이윤석 목사 (NY 부르클린제일교회)

 

필자가 최근 세미나를 인도하다가, ‘십계명도 율법으로 주신 것이니 우리와 실제적으로 상관이 없지 않은가?’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율법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성령으로 새 생명 받은 자로서 이제 우리는 예수 안에서 사랑하면 되고 그 진리만이 충분하지 않는가?’라는 한 영향력있는 목회자가 질문과 동시에 그의 확신을 피력하는 것을 들었다. 또 그런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이들이 있으며 설득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율법과 은혜의 관계에 대해 신약 성경이 밝혀 주는 내용에 대해 분명하게 해야만 한다는 필연성을 느끼면서 요한복음을 중심으로 이 문제에 대해 몇 회에 걸쳐서 다루고자 한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생명과 능력과 활기와 기쁨과 감사와 찬양으로 충만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첫째 본질 적으로 주님에 관한 진리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문자 그대로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이 큰 구원에 참여시켜 주셨다는 사실을 망각해 버리고 사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둘째로 주님이 하신 모든 일을 통해 우리에게 가능해진 일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장 14절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지만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1장 4절도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말씀한다. 예수께서 빛 자체시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이 말은 다른 말로 지금 어둠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그리 스도의 영광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며, 곧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알지 못하고 기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사 람들이 어둠 속에서 침식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한다.

 

그러면 왜 우리가 교인이라고 하면서도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지 못할까? 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생명과 능력과 활기와 기쁨 과 감사와 찬양으로 충만치 못할까? 그것은 율법의 측면에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 충분히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면 에서 우리는 율법과 은혜의 관계에 대한 말씀을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영원한 말씀이신 하나님이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측면에서 무슨 일을 해주셨는지 잘 알아야 진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사도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말하고자 하는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는 바로 사람들이 바로 이런 진리를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 하고서 그 진리를 전개해 나아가고 있다.

 

요한복음 1장 17에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말씀에 대해서 우리는 명확히 알아야 한다.. 여기서 알아야 할 두 가지 원리가 있다.

 

I. 첫째 원리: 율법을 가치 없는 것으로 폄하하려는 의도로 이 말씀을 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 두 가지 오해가 있다. 그것은 “율법은 그만 잊어버려라! 지금은 그리스도의 시대이니 오직 그리스도만을 전해야 한다. 그러니 이제 율법을 언급할 필요가 없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완전히 오해한 것이다. 또 17절의 말씀을 모세의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서로 대조되는 것으로 이해해서, ‘은혜와 진리는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율법에는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또한 완전히 성경을 오해한 것이다.

 

1) 그러면 왜 율법을 버리면 안 되는가에 대해서 알아보자.

 

(1) 첫째로 율법은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법이며 천사를 통해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을 믿는 사람들이다. 율법은 모세가 기도하여 받거나 묵상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서 상세한 율법을 주셨다. 율법은 무엇인가? 사람이 법을 범함 으로 더해진 것이다. 천사들을 통해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이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는 것이다(갈 3:19).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무시하거나 폄하해서는 안된다. 구약에서 율법을 주신 사건은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정점을 찍을 만큼 중요한 사건이며,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모세를 직접 만나셨고 모세는 그 율법을 백성에게 전했다는 의미에서 천지창조만큼이나 중요한 사건이다.

 

히브리서는 이 진리를 말하면서 그들이 들은 진리를 굳게 붙잡으라고 권면한다.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 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보응을 피하리요”(히2:2-3). 율법은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견고한 말씀이다. 여기서 “견고한 말씀”이라고 한 이유는 천사들을 통해 주신 하나님(강조)의 율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결코 율법을 무시하거나 가볍게 말해서는 안 된다.

 

(2) 둘째로 율법에도 은혜와 진리의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을 위해 모세에게 주신 모든 의식법(ceremonial law)과 제물의 의미가 무엇인가? 장막과 성전과 기구와 외복과 상징의 의미가 무엇인가? 아침저녁으로 양을 잡아 죽인 이유가 무엇이며, 황소와 염소의 피가 필요하고 암송아지의 재(heifer)가 필요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대답은 하나 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그 모든 것들이 다 메시아와 구원자로 오실 그리스도라는 위대하신 원형을 가리키는 그림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은혜와 진리가 가득 담겨 있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의 대비를 극단으로 몰아가서는 안된다. 문맥을 잘 이해하고 하나님의 의도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요한은 율법을 깎아 내리기 위해 이 말씀을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주와 구주되신 복되신 분,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위대함과 영광과 온전하신 충만함을 나타내기 위해 이 말을 한 것이다.

 

2) 그러면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를 대조하는 요한의 의도는 무엇일까?

 

대낮의 햇빛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새벽빛을 무시하는 사람이 있는가? 햇빛이 충만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새벽빛은 필요하다. 너무 대조 된다고 이것을 무시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듯, 새벽빛이 가진 아름다음과 의미를 누리고 즐기는 것이 필요하다.

 

(1) 율법과 은혜의 두 가지 사이에는 부분과 전체라는 차이이다. 또한 준비와 성취라는 차이이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먼저 주셨다. 그것은 준비를 위함이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아들 안에서 아들을 통해 은혜와 진리를 온전히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장 17절의 말씀은 히브리서 1장 1-2절 말씀과 상통한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하나님은 여러 모양으로 여러 시대에 여러 형태와 방법으로 말씀하셨다. 계속 율법으로 말씀하셨고, 마침내 마지막에 아들 안에서 단번에(once and for all) 영원히 온전하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오래 전에 주신 말씀이라고 비웃거나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요한의 의도는 온전한 것이 임했으니, 이제 더 이 상 그림자와 예표에만 머물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와 진리를 대조하는 첫 번째 이유이다.

 

(2) 두 번째 대조의 이유는 율법의 오용, 특히 유대인들이 잘못 사용하는 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이다.

실제 이것이 유대인들의 문제점이자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한 이유였다. 곧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율법이 오히려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율법이 걸림돌이 된 것이 아니라, 율법에 대한 오해가 걸림돌이 된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그들에게 율법의 원래 의도와 역할과 목적, 율법과 복음 및 새로운 시대의 관계를 분명하게 알려주고 싶어서 요한복음 1장 17절의 말씀을 한 것이다.

 

2. 둘째 원리: 율법의 중요성과 가치를 알아야 한다.

 

‘율법은 지나간 시대의 상황인데 우리가 그것을 알아볼 필요가 있는가?’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다. 또 ‘율법과 은혜를 이론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이 주제가 얼마나 우리의 직접적인 신앙생활에 큰 상관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절대적인 충만함이 있으며 우리는 그 충만함을 누려야 할 사람이다. 그래야만 우리가 이 세상과 육신과 마귀의 공격에 대해 이겨나갈 수 있다. 우리는 늘 1장 16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더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죄악된 세상을 정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율법의 문제보다 더 현실적인 문제는 없다. 이것은 사도 요한의 당시와 같이 지금의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일을 생각하며 더욱 감사하지 못할까? 왜 우리 마음에 찬양과 감사가 넘치지 못할까?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 한 가지 이유를 말하자면 본문 17절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 우리가 율법의 중요성과 가치를 이해하지 못했을 때, 두 가 지 면에서 실패하게 된다.

 

1) 첫 번째 위험은 율법을 무시함으로 율법이 우리 안에서 일 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특별히 복음주의적 신앙을 가진 분들이 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신약 시대 사람이며, 구원받는 은혜 시대의 설교자이기 때문에 율법을 설교하면 안된다’ 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 또 ‘은혜가 옴으로 율법이 완전히 폐하여졌다’ 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율법을 폐하라고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니다. 가장 위대한 설교자 사도 바울을 보라. 그가 로마서 첫 부분에서 율법의 문제를 다루면서 첫 세 장에서 강조하는 요점이 무엇인가?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과 관련하여 율법의 문제를 말씀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들이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제대로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들이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알려준 다음,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것을 가지고 말한다. ‘그러니 율법이 무가치하고 무익하다는 말이냐?’라는 말에 대해 답변을 주고 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by no means!).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무슨 말씀인가? 은혜는 율법의 안목으로 보아야만 제대로 측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율법의 가르침을 모르면서 은혜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알 수 없다. 은혜가 율법의 정죄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것을 깊이 알아야만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은혜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로 우리에게 무슨 일을 해주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은혜를 측정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 자신이 율법 아래에서 어떤 처지에 놓여 있었는지 모르면 은혜의 진가를 알 수 없다. 그래서 은혜가 율법과 연관되지 않는다면 그 은혜를 피상적이고 값싼 은혜 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누가복음 7장 36-50절의 말씀이다. 주님이 한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가셨는데 그 동네에서 큰 죄인으로 알려진 여자가 들어오더니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고 머리카락으로 닦았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했던 바리새인들은 깜짝 놀라면서 ‘이 여자의 정체를 안다면 접근 자체를 막았을 텐데’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조차 알아차린 예수께서 ‘시몬아 네게 할 말이 있다’라고 하시면서 비유를 베푸셨다. 예수께서 시몬과 이 여자 사이에 대조되는 반응이 왜 나타났는지를 이렇게 결론 지으셨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 하느니라”(눅 7:47). 무슨 뜻인가? 얼핏 보면 ‘죄를 많이 지을수록 많이 사함 받고, 많이 사함 받을수록 많이 사랑하니 마치 죄를 지을수록 좋다’는 말씀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죄 사함의 필요성 자체를 깨닫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이 여자처럼 부도덕한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몬은 훌륭한 삶을 살았다.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고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금식했으니 자신이 사함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의 기도는 “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이었다. 그래서 시몬 역시 죄 사함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했고 따라서 죄 사함을 받지 못했으며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정말 죄 사함 받을 필요가 없었거나 죄인이 아니었던 것이 아니다. 당연히 그는 죄인이었다. 그것도 가장 큰 죄인 영적 교만에 빠졌다는 점에서 그 여자보다 더 큰 죄인이었다. 주님은 “문제는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하는데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다. 주님은 “사람들은 내가 자기들에게 무슨 일을 해주는지 모르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셈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율법은 죄사함의 크기를 측정하고 판단하는 하나님의 기준이라는 것이 출발점이 된다는 것이다. 당신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가? 얼마나 주님을 기뻐하는가? 우리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 베드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당신은 복되신 구주를 얼마나 사랑 하시는가? 그에 대한 대답은 주님 안에서, 주님을 통해 받은 죄 사함의 크기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되어 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의 죄 사함의 깊이와 크기를 알 수 있을까? 그 대답은 한 가지 뿐이다. 자기의 죄를 알고 죄 사함의 필요성을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율법이다. 다른 것은 이 일을 절대로 하지 못 한다. 그러므로 율법의 가르침을 알고 율법 아래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은혜의 진가를 알 수가 없다.

 

그런데도 많은 분들이 은혜와 대조된다고 해서 율법을 무시한다. 이렇게 율법을 무시하기 때문에 자신의 참된 필요를 모르는 것이다.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말은 참 잘하는 것 같다. 그러나 사랑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아주 깊은 것이다.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찾아온 여자처럼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이 사랑은 어떤 감정보다 더 깊은 감정이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대하여 이런 저런 고백을 하며 간증을 하며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말을 너무 가볍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고백을 하기 전에 진심으로 깊은 회개를 해 본 적이 있는가? 자기의 죄를 뿌리깊이 슬퍼해 보았는가? 자기 마음의 재앙을 깨달아 심한 충격을 받은 적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예’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는 주님을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주님께서 “죄 사함 받는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율법의 정죄 아래 있는 자신의 참 모습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으로 얼마나 크게 용서받았는 지 알 수가 없다. 안다고 해도 겉으로만 안다는 말 뿐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무시하지 말자! 주님은 율법의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하셨다(마 5:19). 율법을 무시하면 은혜의 깊이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율법을 무시하는 자라면 그는 신앙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영적인 문제는 너무 빠르고 쉽게 치료를 받으려 한다는데 있다. 너무 서둘러서 해결하는 것이다. 한 시라도 빨리 부담을 덜고 편안해지려고 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처럼 우리는 빨리 율법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고 빨리 은혜를 말하고 싶어하 며, 설교자는 주로 이 말만을 대답으로 제시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빠르게 제시하려 하고, 복음으로 곧장 달려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도입부나 과정을 거치지 않으려고 하고 결론만 말하려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다운 복음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다 준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진가를 깨달아야 한다. 그것을 깨닫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이다.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율법이 드러내는 죄악의 깊이를 깨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점검해보자. 나는 정말 그리스도인일까? 그리스도를 말해도 그리스도의 사랑만 말하고 생각할 뿐, 하나님의 의 앞에서는 떨림(경외)이 없는 분들이 있다. 그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와 그 위대하신 영광을 위해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우리는 율법의 관점에서 자신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너무 빨리 치료만 받으려 하지 않았는가?’ 진단도 하지 않고 진정한 수술 부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주위만 제거하고 닫아버리듯,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그리스도가 절실히 필요 하다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결단하라고 재촉 당해서 강요적으로나 그런 환경이나 분위기에서 복음을 받은 것은 아닌가? ‘세례 받으면 되고 직분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교회를 잘 섬기 면 충분하다’고 말하는 소리에 길들여지지 않았는가? 많이 사랑을 받을수록 많이 사랑하는 법이다. 만약 내가 지금 주님을 적게 사랑하고 있다는 말은 적게 사함 받은 것이며 그만큼 사함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지 못한 것이며, 그만큼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통한 정죄나 그 죄악의 깊이를 철저히 알려하지 않고 제대로 들으력 하지 않고 소홀히 여기는 것이다.

 

2) 둘째로 거룩하게 되는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처음에 그리스도인의 삶을 잘못 시작하면 그 후에도 계속 잘못된 길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율법의 명령을 피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주로 죄를 성가신 문제로 여기지 않는가? 나의 죄에 대해 어떻게 정의하는가? 우리 삶을 망치는 것으로 보는가? 우리를 넘어뜨리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주관적인 정의를 내리고 있지는 않는가? ‘ 이것만 제거된다면 좋겠다’는 식으로 접근하지 않는가? 이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입장에서만 죄를 바라보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율법은 우리의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죄를 바라보게 만든다. 여기서 다윗을 보자. 그는 “주의 목전에서 제가 악을 행했습니다”(시51;4) 라고 고백한다. 다윗의 근심은 그 죄로 인한 자신의 비참함에 있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죄를 극히 미워하시는데, 자신은 하나님과 그가 주신 율법의 말씀의 안목으로 자신을 보고, 그 하나님을 거스리는 죄를 지었다고 고백한다. 이것이 바로 거룩(성화)과 관련된 율법의 문제이다.

 

(1) 많은 사람이 거룩해지기보다는 행복해지기를 원하며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하려고 한다.

그 행복을 얻기 위해 각종 집회나 수련회나 신앙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이 무엇인가? 어떤 지도자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라고 말한다. 성경을 힘들게 읽고 성경의 교리를 이해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율법을 통과하고 먼 길로 돌아갈 필요도 없다고 한다. 이 것이 진정 행복한 삶을 사는 비결이라고 거꾸로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행복을 맨 앞에 두면 안된다. 우리는 무엇을 맨 앞에 두어야 하는가? 거룩함이다. 우리가 행복을 맨 앞에 두는 순간, 길을 잘못 들게 된다. 오히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행복한 삶의 비결이 아니라, 거룩한 삶을 사는 비결이다. 주님은 행복한 삶에 대한 말씀을 시작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나니!(마 5:6), ‘행복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행복을 추구하면서, ‘이 죄만 제거되고 이런 저런 문제만 해결되면 정말 행복할 텐데‘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이렇게 살아가는 자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오늘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만 복이 있고 그가 진정 영적으로 배부르게 되고 만족할 수 있다. 한 가지 문제만 해결된다고 생각하고, 그러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 우리의 문제는 한 가지 죄에 있지 않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전체적인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일차적으로 필요한 것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함과 의와 경건과 진리이다. 율법과 연관된 내용의 문맥 속에서 은혜와 진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다.

 

(2) 거룩함의 관점에서 볼 때 율법에 대한 오해는 결국 반 율법주의(反 律法主義)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

‘나는 이미 은혜 받았고 구원받았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니 문제가 없다’ ‘은혜와 진리이신 그리스도로 인해서 율법은 폐기되었고 예수 안에서 자유하게 되었으니, 율법에 대해서는 꺼낼 필요가 없다’ ‘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분들이 많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기준을 낮추어 세속적인 삶을 살고 있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계시니 성령께서 다 알아서 해주신다는 식이다. 세상이 마음속에 밀려 오는데도 아무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그저 죄 용서 받았고 또 용서받으면 된다는 식이다. 이것이 바로 반 율법주의이다. 구원을 받았으니 죄를 지으면 회개만 하면 되고 어떻든지 구원받은 상태는 유지되니 상관이 없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지금 자기가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위해 구원받았는지 모르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높이며 그분의 크고 거룩한 이름을 더욱 크고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거룩한 삶으로서 예수님을 온전히 닮기 위한 가장 큰 목적으로 구원 받았다. 천국가기 위해서만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바울 자신도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고전 9:21)라고 말할 때 그것은 구약에서 주신 율법과 전혀 다른 법이나 그 의의를 배제한 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을 무시하면 모든 면에서 신앙생활의 부정적인 결과에 이르고 마는 것이다. 그런 이들은 예외없이 피상적이고 말만 그럴듯하며 얄팍하게 행복한 그리스도의 삶을 말하고 살게 된다. 그러나 그런 기쁨은 거짓된 기쁨이다. ‘나는 회심한 이후, 어떻게 살았던지 한 번도 구원이나 모든 진리를 의심해본 적이 없다’라는 분들은 오히려 자신의 구원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 거듭나서 새 생명을 받은 자로서 자신의 삶을 조사해보면, 자신의 말했던 말과는 완전히 대조되는 모습을 발견하지는 않는가? 그러면서 어떻게 어디에서 참 행복이 있다는 것인가? 참 기쁨이 있는 것처럼, 거짓된 기쁨도 있다. 자신이 가진 신념이나 주장을 가지고 설득되고, 설득하는 기쁨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거짓된 기쁨을 걸려내려면, 먼저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비추어 자신을 철저히 점검해 보아야만 하며, 이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시는 율법의 계명 몇 가지만 보아도 죄가 얼마나 심히 죄 되는가를 통감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율법을 통과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로 구원받았으니, 늘 율법에 자신을 비추어 점검하고, 그 은혜로 거룩하게 되고, 율법에 비추어 자신을 회개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삶을 살 것을 말씀하신다. 우리는 우리 죄를 밝히 보여주시는 율법의 말씀을 보고 더욱 깊이 있는 참된 회개를 통과하여, 참된 거룩, 참된 행복, 참된 기쁨이 충만한 신앙이 되자! 할렐루야!

 

[편집자 주 : 위의 글은 2021년 8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3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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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강유남] 창조 경륜과 창세전 구원 계획 복음뉴스 2022.04.11
146 [김현기] 세샘트리오에서 음악 선교사로, 전항 목사 복음뉴스 2022.04.11
145 [김경수] 상처 입은 내 마음 들여다보기 복음뉴스 2022.04.11
144 [이종식] 앞날을 바라보며 청년들을 일으켜야 한다 복음뉴스 2022.04.11
143 [송호민] 예수님도 전도하셨습니다 복음뉴스 2022.04.11
142 [권캐더린] The Super Food 복음뉴스 2022.04.11
141 [조희창] I have a Dream, 그리고 빛으로 오신 예수님! 복음뉴스 2022.04.11
140 [오종민] 당신의 가정은 행복하십니까? 복음뉴스 2022.04.11
139 [김혜영] 진짜 두려워하는 것이 하나님인가? 세상이목인가? 복음뉴스 2022.04.11
138 [이민철] 메이첸 박사 저 『근대세계 안에 그리스도인 신앙』(1936) -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알려지시는가?… 복음뉴스 2022.04.11
137 [유재도] 과테말라 선교 감사 복음뉴스 2022.04.11
136 [문갈렙] 빈 페인트통 감상(感想) 복음뉴스 2022.04.11
135 [한삼현] 이른바 ‘작은 계명’과 ‘큰 계명’이 따로 있습니까? 복음뉴스 2022.04.11
134 [박시훈] 12월에는 '수고했다' 말해주세요 복음뉴스 2022.04.11
133 [조원태] 모세 형에게 복음뉴스 2022.04.11
132 [김종훈] 아버지의 사랑 복음뉴스 2022.04.11
131 [이병준] 말 밥통에 오신 아기예수님 복음뉴스 2022.04.11
130 [김동욱] 성탄절의 추억과 성탄 선물 복음뉴스 2022.04.11
129 [송호민] 우리가 교회입니다 복음뉴스 2022.04.11
128 [배성현] 어디로 가시나이까 복음뉴스 2022.04.11
127 [양희선] 눈이 콩깍지 씌움은 복음뉴스 2022.04.11
126 [김용복] 엄마의 겨울 복음뉴스 2022.04.11
125 [이윤석] 율법은 세상을 진단한다 복음뉴스 2022.04.11
124 [양춘길] 심은대로 거두리라 복음뉴스 2022.04.11
123 [한준희]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복음뉴스 2022.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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