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 기도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민경수 목사 0 2019.07.30 21:35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묵상(영적 훈련1)
본문: 출 33:7-11

현대 사회에서 마귀는 ① 소란함, ②조급함, ③ 혼잡함을 통해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훼방하며 축복받지 못하게 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간구하는 우리 신앙인들은 재창조의 침묵 속이나 묵상의 깊은 세계 속으로 들어 가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의 승리와 패배 여부는 우리 삶속에 바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느냐? 아니면 없느냐?의  유무에 해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회막은 회집의 장소로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는 장막을 가리킵니다. 일반적으로 거룩한 성막의 또다른 명칭이었습니다 (출 29:42, 44).
*참고) 오늘 본문의 회막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지시하신 정식 성막 (출 25:1-31:18)이 아니고 금송아지 숭배사건이후 성막을 완성하기까지 임시로 사용한  장막입니다. 정식 성막은 출애굽 2년 정월 초하루에 세워졌습니다 (출 40:17). 이는 출애굽한지 11개월 15일만입니다.
이 임시회막에서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후 모세는 진으로 돌아 왔으나, 수종자 여호수아는 이 임시회막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해야 모세와 여호수아처럼 하나님과 대면하며 말씀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1.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8절 전반, 7절 후반) 
모세와 여호수아는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 중 하나님을 앙모하는 자는 진 바깥에 있는 회막으로 나아갔습니다. 진 안의 장막에 머무는 자들은 자기 장막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문에 들어가기까지 바라 보았습니다 (본문 8절).
우리 신앙인들도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씀을 들을려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장소로 나아 가야 합니다. 때문에 주일예배는 물론 교회의 모든 공예배와 모임에 참석함은 매우 바람직합니다. 두세 사람이 예수님 이름으로 모일 때, 그 자리에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모이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개인적인 일상생활에서는 “묵상” (meditation)이란 좋은 신앙의 도구가 있습니다. (*참고) “묵상”을 뜻하는 두가지 히브리어 (하가(시 1:2), 쑤아흐(창 24:63))는 약 58회 사용되었음)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들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함, 하나님의 법을 반추함 등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묵상이 중요한 이유는 깊이 있는 삶의 성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했습니다 (창 24:63).
시편기자는 “복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 1:2) 라고 노래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바쁘고 분주한 사역 중에도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는 습관을 가지셨습니다 (마 14:13). 그 곳에서 그는 하나님 아버지와 만나고 음성에 귀기울이시며 대화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능동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묵상을 위해 우리는 준비해야 합니다. ①먼저 적절한 시간을 할애해야 합니다. 하루하루의 일정 가운데 “거룩한 여가”를 가져야 합니다. ②다음에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 조용한 장소를 찾아야 합니다. TV나 인터넷, 스마트폰이 없어야 합니다. ③그리고 가장 편안하고 주위를 산만케 하지 않는 자세를 가지십시오.

2.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 서십시오 (9절)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 갔습니다. 진에 머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막문에 구름기둥이 선 것을 보고, 하나님이 임재했음을 알고 경배를 드렸습니다 (10절). 오늘날도 우리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하나님께 자연스럽게 경배를 드리게 됩니다. 우리는 일상생활 가운데서도 말씀을 묵상하며 그와 같은 임재의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물론이고요!)

어떻게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그 안으로 들어 갈까요? 성경공부는 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반면, 성경묵상은 본문을 내면화하고 개별화하는데 중점을 둡니다. 즉 기록된 말씀이 살아 있는 말씀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로고스logos가 레마rhema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①  겸손한 마음으로 전해지는 말씀을 받아 들이십시오.
②  말씀을 하신 상황으로 들어가 자신을 완전히 잊으십시오. 수동적인 구경꾼이 아니라 적극적인 참여자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3.하나님과 대면하여 말씀을 들으십시오 (9절 후반, 11절 전반)
여호와께서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 보며, 친구처럼 이야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 기독교신앙에 있어 묵상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능력”으로 정의됩니다.
모세는 오늘 본문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고 또한 그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친밀한 관계, 교제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이러한 친밀감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조금 알고 나서는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는 것이 두려운 일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모세에게 대신 말씀해 달라고 부탁하여 위험부담없이 종교적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출 20:19). 그러나 이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함께 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 생생히 체험하지 못하는 헛된 발걸음이 되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충만하게 자발적으로 신앙생활할 수 없어 결국은 모두 광야에서 엎드러져 죽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는 신앙생활하며, 혹자는 모세처럼 직접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 그 얼굴을 보며 음성을 친히 들을 수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를 부담스러워 하여 목사님이나 기타 사역자들에게 위임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지 않고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말씀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얼굴을 보고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미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용서하시고 하나님 보좌에 이르는 새롭고 산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제 우리 신앙인들은 누구나 직접 하나님 보좌에 나아갈 수 있는 “만인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말씀묵상을 하지 않는 것은 이 귀중한 특권을 사용치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늘 아버지와의 친밀한 교제로 듣고 순종하는 삶의 모습을 본보일 수 있었습니다 (요 5:19, 30절; 14:10). 우리 신앙인들은 “방해받지 않는 교제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늘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복된 신앙인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모세는 이처럼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 그 임재 안으로 들어 갔습니다. 그리고 얼굴을 하나님과 대하며 말씀을 들었습니다. 십계명 증거판을 두번째 가지고 내려온 후에는 그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났습니다. 오죽 했으면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회막에서 나올 때는 수건을 얼굴에 두르고 하나님 말씀을 전했을까요? 그 다음엔 회막으로 들어가 다시 수건을 벗고요!!! (출 34:29-35)
모세의 수종자 청년 여호수아는 어땠습니까? 그는 회막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본문 11절 후반 “...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가 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장소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는 모세에 이어 이스라엘 민족의 후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들의 삶에 있을 때 우리는 승리합니다. 그러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할 때 우리의 인생은 실패한 삶이 됩니다. 
이 모세와 여호수아와 같이 늘 하나님과 함께 하며 얼굴을 대면하고 음성 듣는 축복된 삶을 사시는 우리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살아계신 하나님의 얼굴과 음성을 갈망하십시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우리 모두 묵상을 위한 소원과 은혜받기를 기도하며 훈련하시길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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