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논단

 

루터의 사역과 죽음

편집인 0 2017.02.14 19:52

고향 아이스레벤에 도착한 루터 

루터는 오랜 수도사 생활과 설교 등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으며, 대략 40세 이후부터 병약한 사람이 되었다. 루터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병세가 약화되어 신장 결석, 복통, 소화불량, 신경성두통, 만성 피로, 통풍, 우울증 같은 수많은 질병에 시달렸다. 질병이 루터의 삶 자체였을 정도로 병치레를 많이 했다. 이는 아내의 끊임없는 걱정거리이기도 했다. 루터는 말년에 많은 질병에 시달렸는데, 이러한 질병을 악마의 탓으로 돌렸다. 노년의 계속되는 질병으로 인해 루터에게는 두려움도 있었다.
 

▲ 루터가 마지막으로 설교했던 성 안드레아스 교회 내부      ©뉴스파워 김현배


하지만 루터는 평생 온갖 질병과 싸우면서도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건강상태나 기분에 상관없이, 설교를 쉬지 않았다. 때로는 편지와 소책자들로 계속 설교했다. 이러한 열정이 우리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1546년 1월 17일 루터는 비텐베르크에서 마지막으로 설교했다. 그 후 루터는 남은 사역을 잘 마무리하기 위해 자신의 고향 아이스레벤을 방문하고 싶어 했다. 

차가운 한겨울에 어쩔 수 없이 또 한 번의 피곤한 여행을 해야만 했다. 루터 일행은 만스펠트와 할레를 거쳐 1월 28일 아이스레벤에 도착했다. 루터는 점점 더 건강이 악화되어 갔지만 설교했다. 비텐베르크에서 출발하기 전부터 루터는 자신을 “늙고, 피곤하고, 지친, 그리고 차가운” 이라고 표현하면서 몸 상태가 좋지 않음을 얘기했다. 추운 날씨와 좋지 못한 길 상태는 루터 건강에 더 큰 부담을 작용했을 것이다. 

결국 루스돌프(Ruessdorf) 근처를 지날 쯤 루터는 마차 안에서 심장마비를 겪게 되었다. 일행들은 루터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서둘러서 의식을 잃은 루터를 아이스레벤으로 이송하였다. 이전에도 루터가 몸이 안 좋아 의식을 잃었을 때 따뜻한 수건으로 마사지를 받았는데 이번에도 마사지를 하였다. 덕분에 저녁 시간 쯤 루터는 다시 의식을 회복하고 저녁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나중에 루터의 서신들을 확인해보니 루터가 멜란히톤에게는 심장마비에 대해서 솔직하게 얘기하였지만 아내인 카타리나에게는 어지럽고 몸이 약한 상태라고만 얘기하였다. 아내가 이미 루터 건강과 상태에 대해서 많은 우려와 걱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 안드레아스 교회에서 마지막 설교 

루터는 아이스레벤에 있는 성 안드레아스 교회(St. Andreaskirche)에서 1월 31일과 2월 2일, 2월 7일, 2월 14일에 4편의 설교를 했다. 그리고 두 차례 주의 만찬 집례에 참여했다. 그런데 2월 14일, 마태복음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루터의 마지막 설교는 건강 때문에 오래 할 수 없었다. 루터는 설교를 하던 중에 힘들어서 중단하고 내려왔다. 그는 육체적인 허약함과 피로로 인해 그 설교를 다 끝내지 못한 채 중단해야만 했다. 

그는 지치고 허약했으며 몹시 춥고 한쪽 눈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눕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이것이 루터의 마지막 설교였다. 그때의 설교단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루터가 죽은 후 그의 유해는 이곳 성 안드레아스 교회에서 이틀 동안 보관되었다. 발인예배도 이곳에서 집례 되었다.
 

▲ 루터가 마지막으로 설교했던 성 안드레아스 교회 ©뉴스파워 김현배


마지막 성만찬, 목사 안수 

2월 14일, 루터의 마지막 성만찬은 두 명의 목사 안수 임직식 때 이루어졌다. 임직식을 인도한 것이 루터의 마지막 공식 사역이기도 하다. 루터는 아이스레벤 성 안드레아스(St. Andrew's) 교회에서 2월 14일 두 명의 목사 안드레아스 크라우제(Andreas Krause)와 에사이아스 발라(Esaias Valla)에게 안수하였다. 루터는 두 명의 목회자를 임명하여 세웠다. 

루터의 마지막 순간들 

2월 17일, 루터의 병세는 더욱 중해졌고, 그는 침대 밖으로조차 나올 수 없게 되었다. 이 때 루터는 어쩌면 자신이 비텐베르크로 돌아가지 못할 수 도 있다는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는 그래서 할레에서부터 함께 동행한 유스투스 요나스(Justus Jonas)에게 “나는 여기 아이스레벤에서 태어나고 세례를 받았는데 - 내가 여기에 계속 머물게 되면 어떻게 하지?” 라고 묻기도 하였다. 유스투스 요나스와 미카엘 퀼리우스(Michael Coelius)는 루터가 자신의 방에서 쉼 없이 왔다 갔다 하면서 큰 소리로 기도했다고 당시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저녁 식사 전, 루터는 가슴 쪽에 큰 고통이 있다고 호소하였는데 곧 따뜻한 수건들로 마사지를 받고 나서는 상태가 호전되었다. 저녁 식사에 함께한 루터는 성경 구절들을 해설하고 나누었으며 지인들과 가벼운 농담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늦은 저녁부터 루터는 심장 발작을 일으켜 곧 침상으로 옮겨졌다. 가슴 쪽 통증은 다시 찾아왔고 루터가 “고통이 크고 이렇게까지 가슴이 아픈 적이 없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지인들은 아이스레벤에 있는 의사 두 명을 부르고자 하였으나 루터가 이를 거절하였다. 대신 알브레히트 백작(Count Albrecht)이 직접 방문하여 당시 매우 귀중한 의약품인 “일각고래 상아(narwhal tusk)을 루터에게 주었다. 이러한 약품을 받았다는 것이 루터가 주변으로부터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치료 후 루터는 한 시간 반 동안 잠을 잘 잤으나 새벽 1시 쯤 다시 깨었다. 그는 가슴이 꽉 죄어오는 압박감을 느끼면서 고통을 호소하였다. 루터는 한 밤중 오한으로 갑자기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차가운 죽은 땀이었다. 루터는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전조라 생각했다. “요나스 박사. 이 고통이 너무 크다네. 내가 아이스레벤에 남을 것 같네.” 루터의 일행들은 전부 잠에서 깨어 루터에게 달려왔고 일부는 루터에게 따뜻한 수건으로 문질러주었다. 치료에 진전이 없고 고통은 계속 되나 루터는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느꼈는지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날 밤 끊임없이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아버지, 자비로운 하나님, 당신은 나에게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주셨습니다. 나는 그 예수님에 대해서 가르쳤고 예수님 안에서 믿음을 고백하고 그를 사랑하고 나의 구주와 주인으로 영화롭게 하기를 원합니다. 이 예수님을 대적들은 핍박하고 모욕합니다. 주님 나의 작은 영혼을 받으소서.” 루터는 마지막 고통 중에 세 번에 걸쳐서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시편 31:5)라는 말씀을 반복하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셨던 말씀이다. 임종 전 루터의 마지막 기도문이다. 

루터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삶과 사역의 기초가 된 말씀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을 고백하였다. 루터는 이처럼 죽기 전까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 완전한 신앙의 고백을 하였다.
 

▲ 루터 사가 ©뉴스파워 김현배


그 후 루터는 잠시 동안 의식 없이 누워 있었고 두 의사와 백작의 부인은 루터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그들의 노력 덕분에 루터는 잠시 깨어났고 묻는 질문에 짧은 대답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유스투스 요나스와 만스펠트의 설교자인 미카엘 퀼리우스(Michael Coelius, 1492-1559)가 함께 루터의 곁에 있었다. 요나스는 그에게 임종이 가까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그는 루터가 임종 전에 증인들 앞에서 신앙고백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었다. 이러한 신앙 고백은 당시 중세에서 임종을 앞둔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의식 중에 하나였다. 

요나스는 루터에게 “존경하는 목사님,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구주와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믿음을 고백하십니까?” 물었고 루터는 짧게 “예”로 대답하였다. 이러한 질문들이 몇 개 더 있었고 루터는 그때마다 예로 대답하였다. 루터가 죽기 전에 분명하게 신앙고백을 했다. 

얼마 후 루터는 다시 의식을 잃었다. 그 자리에는 사제도 없었고, 어떤 성례도 거행하지 않았으며, 마지막 고해도 없었다. 대신 하나님을 믿는 순전한 확신만 있었다. 이 모든 일은 그의 가르침이 세상을 바꿔 놓았음을 증언해 주었다. 루터는 신앙고백 했던 것처럼 확신 속에서 죽었다. 

불꽃같은 루터의 삶이 멈추다

1546년 2월 18일 새벽 2시 45분, 루터는 조용히 눈을 감았고, 그의 영혼은 이 땅을 떠나 하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의 나이 62세, 루터의 심장이 결국 멈추고 말았다. 일생동안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루터는 자신이 태어난 아이스레벤에서 그의 파란만장한 삶이 끝났다. 루터는 이 땅을 떠나 역사의 문으로 들어갔다. 이신칭의의 교리를 재발견한 루터가 일생동안 주님의 증인으로 살다가 부름을 받았다. 그가 그토록 사모하던 주님 곁으로 갔다. 
루터의 죽음 후 그의 탁상위에 메모 한 장이 발견되었다. 그의 마지막 메모 내용이다. 

“5년간 목자로 살지 않았다면 버질의 목가시를 이해할 사람은 없다. 
5년간 농부로 살지 않았다면 버질의 농경시를 이해할 사람은 없다. 
25 년간 폭넓은 교류와 국가사업에 관여하지 않았다면 키케로의 서간집을 정확하게 이해할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만약 100년 동안 엘리야와 엘리사 같은 선지자들, 세례 요한, 예수님 그리고 사도들과 함께 교회를 섬기지 않았다면 어느 누구도 성경 말씀을 충분히 맛보았다고 주장할 수 없다. 
버질의 서사시 ‘아니네이스’를 분석하듯 이 거룩한 말씀을 다루지 말고 말씀 앞에 엎드리고 순복해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구걸하는 거지들이다. 이것이 참이다.”

 

▲ 루터 사가 박물관 ©뉴스파워 김현배


위대한 종교개혁자 루터의 마지막 유언이라고 할 수 있다. 루터는 우리가 모두 파산한 거지와 같다는 메시지로 결론을 내린다. 사람은 자기 손을 하나님을 향해 뻗으며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루터가 남긴 마지막 문장은 실로 나그네요 순례자의 길을 걷는 인간 존재에 대한 명확한 표현일 것이다. 인간은 엄마의 태안에서부터, 태에서 나와 첫 호흡을 하며 마지막 숨을 거두기까지 전적으로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의존하고 받아야 살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의 걸인이다.”는 마르틴 루터의 마지막 메모의 진리는 유언과 같이 지금도 울려퍼지고 있다. 

장례 

루터가 죽을 때 아들 둘이 동행했다. 유스투스 요나스는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와 멜란히톤과 부겐하겐에게 루터가 세상을 떠났다고 즉시 전갈을 보냈다. 그때 루터의 신실한 친구인 멜란히톤은 로마서 강의를 하던 중에 루터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열왕기하 2장 12절 말씀을 인용하여 이렇게 울부짖었다. “아! 이스라엘의 마부가 죽었다. 이 마지막 시대에 교회를 이끌었던 이가 세상을 떠났도다.” 바로 엘리사가 하늘로 떠난 엘리야 선지자를 보고 외친 말이었다. 부인 카타리나는 자기 남편의 죽음 소식을 제일 늦게 들은 사람이었다. 

2월 19일, 루터가 죽은 후 그의 유해는 성 안드레아스 교회에 이틀 동안 보관되었다. 이 교회에서 발인 예배가 있었다. 할레 지방의 개혁가요 루터의 제자인 유스투스 요나스가 설교했다. 그들은 루터를 아이스레벤에서 장사지내기를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센제후는 루터의 매장이 비텐베르크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주검은 성 안드레아스 교회에서 발인예배를 마쳤다. 

2월 20일, 장례 행렬이 사륜 마차로 종교개혁자 루터를 싣고 할레시를 거쳐 2월 21일, 비터펠트(Bitterfeld)에 도착했다. 장례 행렬이 지나가는 마을마다 종이 울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루터의 관이 지나갈 때 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장례 행렬은 멜란히톤의 집 맞은편에 위치했던 루터하우스를 지나 비텐베르크 성 교회로 향했다. 비텐베르크 시 전체가 시신을 맞이하러 나갔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가운데 관이 22일 비텐베르크 성교회에 도착했다. 

곧바로 드려진 장례예배에서 비텐베르크 시 교회 목사인 부겐하겐이 독일어로 설교를 하고, 멜란히톤이 대학을 대표해서 라틴어로 죽은 자를 위한 조사를 낭독했으며, 루터를 하나님의 도구라고 일컬었다. 장례식을 마치고 비텐베르크 성 교회 안에 위치한 무덤에 관을 내렸다. 루터의 유해는 그가 자신의 95개조 논제를 못 박아 게시하였던 비텐베르크 성교회의 설교단 바로 아래에 안장되었다. 

장례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은 루터보다 더 위대하고 더 창조적인 인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 루터의 무덤을 찾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루터는 죽어서도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계속 이끌고 있다. 루터의 무덤은 종교개혁 순례여행의 성지가 되고 있다. 루터파 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되었다.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2017년 10월 31일, 전세계에서 비텐베르크 성 교회로 몰려들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기억하는 일은 은혜요 하나님의 축복이다. 루터의 신앙과 믿음, 열정, 말씀에 대한 확신 등을 배우고 복음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 비텐베르크 성 교회 설교단 아래에 있는 루터 무덤 ©뉴스파워 김현배


글 : 김현배 목사(베를린 비전교회, GMS 독일 선교사, 뉴스파워 유럽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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