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논단

한국교회, 예배로 망한다 -2부

조정칠 2 2018.04.05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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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는 은사의 애절한 영혼의 호소를 전달했었다. 2부는 그 스승에게 배운 제자로서, 같은 예배 문제를 토로하려고 한다. 나는 주일 예배를 60년 넘게 인도하고 있는 목사(牧事)이다. 다른 목사도 주일마다 예배 인도를 함으로 목회를 이어간다. 멈춰서는 안 될 예배, 건너뛰어서도 안 될, 정확한 날 정확한 시간에 예배 책임자로서 사명을 다 한다. 

 

세월이 가면 사람이 늙는 것처럼, 모든 것이 세월을 못 이겨서 퇴화가 되기 마련이다. 2,000년 간 예배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생각을 해보고, 한편 예배가 얼마나 퇴화되었는지 함께 생각해 볼만하다. 잘 된 것은 이야기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잘못된 것이 있으면 바로잡아야 한다. 잘못이 누적되어 굳어버린다면 체념이 불가피하다. 그런 상태로 계속 가다보면, 잘못이 정도처럼 생각되어져 아무 가책도 느끼지 않게 된다.

 

그렇게 되는 것은 비극이다. 지금 한국 교회 예배가 굳을 대로 굳어져서 바로잡기가 불가능할 지경이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썩은 부분이 있어도 목사의 권위가 손상될까봐 굳은채로 태연하게 예배한다. 예배는 하나님께 올리는 제사다. 목사가 중간에서 바르고 참되게 역할을 잘해야 한다. 그런데 목사가 오히려 무슨 방해를 한다면 그것은 안 될 일이다.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치 않게 변질된 구린내가 난다면 제사가 이미 실패이다. 그런 사례가 있다고 인정하면 한국 교회는 희망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런 생각을 한다고 나를 이단으로 몰아갈 것이다. 누가 더 이단적인지 한번 짚어보고 싶다. 감각이 마비가 되면 무슨 말도 소용없다. 예배가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예배는 목사의 것이 아니다. 예배는 교인들의 것이다. 목사가 없어도 예배는 드릴 수 있다. 그러나 교인이 없으면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 목사와 교인이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둘 중에 누가 더 중요한가? 당연히 교인이 90% 더 중요하다. 목사는 10% 쯤이라고 후하게 배려한다. 목사는 얼마든지 초청이 가능하다. 그러나 교인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교인은 스스로 나오는 진실한 자다. 목사는 직무상으로 나오게 되어 있는 업무이다. 교인은 무슨 핑계로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목사는 절대로 그럴 수 없는 구속된 자이다. 하나님은 어느 쪽 예배를 더 기뻐하실까? 당연히 교인들의 예배를 더욱 기뻐하신다. 그 교인들 덕분에 목사가 일이 있고, 존재 가치가 인정된다.

 

교인들의 예배를 만족하게 하는 것이 목사의 직무이고 책임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인들은 자기 목사를 최대한으로 대우하고, 존경하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보면, 목사와 교인의 관계는 아주 많이 좋을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서로서로 상대방을 존경하여야 마땅하다. 어느 한 편에서라도 상대를 무시하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예배는 물론 수포로 돌아간다.

 

예배는 어느 쪽이 더 신경을 써야 하는가? 그것은 100% 목사가 책임을 져야한다. 그 까닭은 그런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아 목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 교회 중에는 목사가 교인을 무시하는 사례가 허다하다. 특히 예배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교인을 무시하는 예배는 예배라 할 수 없다. 그런 것을 전혀 모르고 있는 목사가 너무 많다.

 

이것이 이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이다. 목사 자신이 교인을 얼마나 무시하고 있는지 가르쳐 주어도, 인정하지도 않고 고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한다면 예배가 달라지고, 교인이 달라지고, 하나님의 응답이 달라질 것이다. 목사 자신도 마음이 편하고, 일이 쉽고, 관계가 부드럽고, 만사가 아름답고, 목사를 교인들이 우러러 받들게 될 것이다.

 

목사들 중에는 피해망상증 환자가 생각보다 많은 것 같다. 교인들 좀 잘 되게 해 주라고 하면 당장 반발한다. 목사가 잘 되면, 교회가 저절로 잘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목사 잘 되는 교회를 만들어 보려고 온갖 꼼수를 다 부리는 추세이다. 교인이 잘 되는 교회가 주님의 교회이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 때문이다.

 

목사들은 교인을 위하여 무엇을 버리는지 자기가 잘 알 것이다. 교인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알면서 이행하지 않으면 가짜일 수 있다. 아니면 가증하던가! 그렇지도 않다면 가소롭다, 할 것이다. 목사가 그 정도라면 상태가 최악이다. 종교 개혁 500주년에 기념, 각성 그런 것 말고 고칠 것을 고쳐야 한다.

 

이 글을 읽고 열 받을 목사들 얼굴이 환하게 떠오른다. 그래도 시기를 놓치고 슬피 울며 이를 갈지 말고, 때를 살려 제대로 된 목회를 하고 나면, 그 때 내 말이 거짓이 아닌 것을 고백하게 될 것으로 믿고 이 글을 마감한다. 교인을 무시하는 내용을 여기에 적어주면 엄청난 역효과가 날 것을 알기에, 여기에 알려줄 필요가 없을 것 같다.

 

ⓒ 복음뉴스(BogEumNews.Com)

Comments

김동욱 2018.04.05 17:52
조정칠 목사님께서는 한국의 농촌과 도시, 미국의 뉴욕과 필라델피아 등 "다양한 곳에서 성도를 위로하는 설교자로 살아 오셨습니다. 낮은 곳, 소외된 사람 그리고 스스로 일어설 힘이 없는 자들에게 힘을 주고, 성도들을 외롭지 않게 하는 목회의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마음이 따뜻하신 조정칠 목사님은 그의 마음을 글로 풀어 놓은 일을 쉼 없이 하여,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께 더욱 맞추고,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많은 저서들을 남겼습니다."

조정칠 목사님의 저서 : <청노>, <예수의 소금론>, <옹신론>, <예수의 첫나들이>, <사람 안에 사람있어>, <요한의 예수환상곡 G 장조>, <하얀마을 사람들>, <라합의 러브 스토리>, <숨쉬는 이야기>, <목사는 개를 좋아하는가?>, <목사의 죄>, <베드로 다시보기>, <어머니의 목회학>, <수가성 그 여자>, <그 여성을 변호한다>, <어머니 기도학>, <순애보>, <숨쉬는 이야기>, <작은 부흥회>, <전라도 사람들> 외

조정칠 목사님은 뉴욕으로 이민을 오셔서 서울장로교회(든든한교회의 전신)를 개척하여 섬기시다가 한국에 있는 신용산교회의 청빙을 받아 사역지를 서울로 옮기셨습니다. 신용산교회를 섬기던 중 실명의 위기를 맞기도 했었습니다. 신용산교회를 사임한 후에, 대전에 있는 혜천대학의 교목실장으로 혜천대학교회를 섬기다가 은퇴한 후에, 자녀들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중부 뉴저지(Edison)에 거주하시면서, 필라델피아에 있는 불루벨한인장로교회의 설교목사로 강단을 지키고 계십니다. 뉴욕목사회장을 연임한 유일한 목사님이십니다. 80대 중반을 지나고 있는 고령임에도 여전히 집필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빅토리 김 2019.01.30 19:15
대충 감은 잡히는데.... 귀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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