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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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지식

이윤석 목사 0 03.22 17:49

[들어가며]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새 생명의 특징들을 살펴보고 있다. 이 메시지는 로이드 죤즈 목사님의 요한복음 강해를 발췌하여 수정한 내용으로서 필자는 그의 강해 설교들을 깊이 묵상하고자 하여 인용하는 내용이다.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는 직접적이고 즉각적이며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려는 데 있다. 새생명을 가진 자는 이런 인식이 더 깊어져 가는 것이 당연하다. 참된 기독신앙의 큰 특징은 항상 내적인 생명과 내적인 성장으로 타난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3:16)라고 기도한다. 거듭난 자는 자신에게 속사람이 있음을 인식한다. 만일 이 내면의 생명, 내면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새 생명을 받지 못한 자라고 할 수도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몸은 잠시 머무는 일종의 장막과 같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속사람이 잠시 머무는 장소이지만, 몸이 없는 자기 자신은 상상도 하지 못한다. 세상 사람들이 아는 유일한 삶은 오직 인간관계로만 이루어지고 인간관계에만 의존하는 삶이다. 그들은 인생의 즐거움과 행복과 쾌락을 비롯한 모든 것을 인간관계에서 찾는다. 그것을 빼앗기면 완전히 길을 잃고 어디에서도 위로나 위안을 찾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면 새 사람, 속사람, 신령한 사람이 생긴다.

 

1. 새 생명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관심을 갖는다


속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지식을 열망한다. 사람들은 늘 도덕처럼 외적이고 표면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인 것이다. 새생명을 가진 자는 종교적 의무나 신학이나 축복보다 이 지식에 더 관심을 갖는다. 베드로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벧전 3:18)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했다. 주님도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17:3)이라고 하셨다.

 

1)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심을 안다

하나님을 아는 일은 이 땅에서 시작된다. 어떤 청교도 그리스도인은 나의 죽음의 선물로 이 말을 남기니, 하나님은 인간을 친근히 대하신다고 했다. 곧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분이지만, 동시에 가까이 계시는 분이기도 한다. 새 생명, 속사람, 새사람이 생긴 자는 영원하시고 영존하시는 하나님이 온 우주의 중심과 핵심임을 알 뿐 아니라, 동시에 가까이 계신 것을 발견한다. 하나님은 높고 거룩한 곳에계시는 거룩하신 분인 동시에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계시는 분이다(57:12).

 

2) 거듭난 자는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것을 인생 최고의 특권으로 여기며 주된 목표로 삼는다

예를 들어 사람들과 더 많이 교제하고 싶은 열망, 높고 귀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더욱 대화하고 싶은 열망이 어떤 것인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육신의 차원에서도 그렇지만, 영적인 차원에서는 무한히 그렇다. 다윗은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42:1-2) 라고 기도한다. 그에게는 살아계시는 하나님과 교통하려는 열망이 있었다.

 

3) 실례들을 살펴보자

(1) 신학자들. 그들의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 그들은 지적으로만 접근할 때 빠지기 쉬운 위험이 바로 이것이다. 철학자들의 하나님은 확실히 죽은 하나님이다. 그들의 하나님은 관념일 뿐이다. “절대자”, “무한자”, “궁극적 원인처럼 하나님을 가리키는 용어들을 보면 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다윗은 온 존재를 다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했다. 이것은 그의 마음에서 솟아난 열망이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과 정서와 온 존재를 다해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라고 외쳤다. 그에게는 이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었다.

 

(2) 파스칼. 그는 큰 체험을 하고 정확히 같은 말을 했다. “철학자들의 하나님이 아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는 명석한 철학자이자 수학자요 놀라운 사상가로서 하나님과 이런 문제에 대한 내용을 철학적으로 다루었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한 후 거기 압도되었고, 그것이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체험임을 알게 되었다.

 

(3) 야곱. 그의 브니엘 체험도 그렇다. 그는 자신이 참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과 만났음을 알고 그를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것은 인생 최고의 체험이었다. 전에 벧엘에서도 큰 체험을 했지만, 이것은 그보다 훨씬 더 큰 체험이었다. 야곱이라는 사람의 성격과 인생 전체를 통찰하고 이해하게 해준 체험이었다. 파스칼은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이론적이고 철학적으로 접근하며 토론하고 논쟁하는 차원, 곧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증거들에 연연하는 차원에서 야곱과 같은 체험의 차원으로 넘어온 것을 알았다. 물론 그런 증거를 찾는 것도 유익하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을 한번 체험하고 나면 다른 증거가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된다. 이보다 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4) . 그는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23:3)라고 외쳤다. 여러분은 욥처럼 질문해 보았는가? 욥 같은 심정을 느껴보았는가? 하나님을 구하고 찾으면서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할까!”하고 외쳐보았는가? 욥은 지극히 아름답고 거룩하신 주님께 온전히 사로잡히는 마음이 점점 더 커져, 그것이 그의 일생에 가장 크고 깊은 열망이 되었다.

 

4) 자신을 점검하자

주일 아침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 온다. 그러나 그 예배가 늘 반복되는 것 때문에 아주 기계적으로 올 때가 많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지 않는가? 우리 모두 그랬던 것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하지 않는가? 이제 우리가 던질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만나러 오는 것인가? 하나님을 찾고 싶은 열망 때문에 오는 것인가? 브니엘에서 오직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축복을 얻고자 싸우고 씨름했던 야곱의 간절한 심정을 가지고 오는 것인가? 거듭난 자에게는 이것이 중요한 일이 된다. 그 당시 야곱은 걱정거리가 많았다. 형 에서를 만나 모든 소유와 재산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것은 야곱에게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그런데 이 다른 분을 만난 순간, 소유나 재산을 비롯한 모든 걱정거리를 잊어버렸다. 이 만남 외에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과 만나는 일이 인생 최고의 목적이 되는 것이야말로 항상 새 생명의 시금석이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체험의 최정상에 있는 사람이었음에도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3:10) 한다고 외쳤다.

 

5) 우리는 방해자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마귀가 다가와 그래 성경 인물들은 그랬지만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야라고 속삭일 위험이 있다. “전부 족장들에게 해당되는 일이지. 그들은 특별하니까. 그리고 사도들한테 해당되는 일이지. 그들 역시 특별하니까.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한테만 해당되는 일이야. 그들도 특별하니까.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한테만 해당되는 일이야. 그들도 특별하니까라고 생각하며 성경의 많은 부분을 제외해 버린다. 아니다. 이것은 모든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이 체험한 일이다. 특정 유형의 사람들만 체험한 일이 아니다. 그런 기질을 타고나서 자연스럽게 신비한 데 빠지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모든 사람이 그래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된다는 사람들이 있다. 이 또한 마귀의 거짓말이다. 이것은 새출생과 관련된 것이다. 성령으로 태어난 일과 관련된 것이다. 이것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요 성령이 주시는 생명이기에 우리 모두 받아 누릴 수 있다. 교묘한 변명으로 빠져나가면 안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체험할 수 있는 일이다.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 무슨 이상을 보거나 하늘의 음성을 듣는 것도 아닌데 생생하게 체험한다. 이런 열망에 대해 알거나 이런 정서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성령으로 태어나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일에 아무 관심이 없다. 성령으로 진정 거듭난 자만 이 열망을 느낀다.

 

2. 속사람은 복되신 성자 하나님을 더 깊이 알려고 한다


우리는 성자 하나님께 관심이 있는가? 구원의 혜택에는 모두 관심이 있는가? 모두 용서받기를 바라고 죄에서 놓여나길 바라며 행복해지길 바란다. 그 바람은 지극히 정당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혜택을 우리가 구할 수 있지만, 그런 것은 원수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위조해 내기 때문에, 우리가 그 정도에 만족하면 미혹될 수 있다는 것이다.

 

1) 성령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보냄 받으신 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라는 분께 더 큰 관심을 갖게 되느냐 하는 것이야말로 성령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지 검증하는 시금석이 된다. 성경에 나타나는 성자의 영광에 점점 더 관심을 갖게 되는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들, 성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자체를 상고하고 묵상하길 좋아한다. 우리 주님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창세전부터 영원한 영광 가운데 성부와 함께 계셨던 주님을 생각하길 좋아한다. 주님의 모습을 묘사하는 성경 본문을 찾아 읽기를 좋아한다. 이것이 새 생명의 징표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기독교 복음 메시지를 참으로 믿는 자는 반드시 그럴 수밖에 없다. 누군가 나에게 친절을 베푼 이가 있음을 알게 될 때, 처음 하게 되는 말은 한번 만나보고 싶다. 만나서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고 싶다라는 것이다. 그가 내게 무슨 친절을 베풀었는 지 아는 데서 만족하지 못한다.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더 알고 싶어진다. 영적인 차원에서도 그렇다. 복되신 성자의 영광에 관심을 갖게 된다. 물론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성자에 대한 말씀을 읽으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날 위해 죽으셨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하고 묻게 된다. 성육신의 경이와 영광을 생각하며 기뻐하게 된다. 육에 속한 자는 아무리 지혜롭다고 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육에 속한 자는 신학적 사안이나 철학적 논쟁의 주제에는 관심을 보여도 인격적인 관심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으로 태어난 자는 그 안에 새 생명이 있기 때문에 인격적인 관심을 보인다.

 

2) 성육신에 대해 살펴보고 묵상하기를 좋아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2:6-7) 말씀을 읽으며, “이것이 무슨 뜻일까?”라고 묻는다. 그 말씀을 분석하기를 원한다.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시기 위해 그 모든 특권을 버리셨다.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는 구절의 진정한 의미는 그것을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주님은 영광의 표지를 내려놓으시고 세상에 오셨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1:14)

 

3) 성령으로 태어난 자에게 이것은 무엇보다 놀랍고 기이한 일이다

그는 복되신 분의 생애와 사역을 주의 깊게 지켜본다.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복음서를 읽어간다. 살아 있는 관심이 생겼기에 단순한 역사 자료 대하듯 하지 않는다. 역사책을 읽는 것과 내가 사랑하며 가까이 알고 지내는 친밀한 사람에 대한 글을 읽는 태도는 완전히 다른 법이다. 거듭난 자는 새로운 관심을 가지고 복음서에 나오는 우리 주님의 생애와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다. 주님이 사람들을 대하시는 모습, 가난한 자들과 세리와 죄인과 욕먹는 자들을 대하시는 모습을 살펴보길 좋아한다.

 

4) 거듭난 자는 십자가의 죽음을 바라보며 묵상한다

바울 사도는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6:14)라고 고백한다. 여기서 주님의 죽음에 대한 이론을 믿는 것과 그의 죽음을 분명한 사실로 믿고 자랑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지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도 그의 죽음을 믿을 수 있지만, 자랑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새 생명을 얻은 자는 그의 죽음을 자랑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기에,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 갚겠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149)라고 찬양하는 것이다. 이것은 새생명 얻은 자만 아는 마음이다. 그의 죽음은 더 이상 외적인 사건이 아니다. 마음속에 이미 예수의 십자가가 있다. 영적으로 십자가를 보고 있다. 내적으로 십자가를 보고 있다. 십자가가 자신의 전부가 되어 있다. 모든 시대 하나님 백성의 특징이 이것이다. 거듭난 자는 이처럼 주님이 죽으시고 장사되신 일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 부활의 영광 가운데 게신 일도 생각한다. 하늘에서 통치하고 계신 일도 생각한다. 그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리는가? 기이하며 놀라는가? 마음이 고양되어 황홀경에 빠지는가? 내 자신이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기는(6:11) 분명한 사실이 있다.

 

5)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영광 가운데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사실도 깨달아 안다

주님께 나아가자. 주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을 기억하자. 이것은 자기 설득의 문제가 아니다. 주님께 나아가면 되고, 그가 하나님 우편에 계신 것을 기뻐하면 된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28:18) 받으셨다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면 된다. 그는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고 계신다(10:13). 히브리서 기자가 서신을 쓴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이 편지를 받을 자들이 침체하고 불행한 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박해 속에 아주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모든 것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열 세 장에 걸쳐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일깨우려 한 것이며, 그 한 가지 사실이란 바로 그리스도라는 분을 분명히 모르는 데서 모든 문제가 나온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시작하자마자 이렇게 외친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1-2). 우리의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며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원수들과 어려움과 문제만 바라보지 말고 그를 상고하라는 것이다. 주님이 모든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 우편에 계심을 알라는 것이다. 그가 원수들을 발등상으로 삼으실 때까지 기다리고 계심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이런 사실이 우리의 정신과 마음과 관심을 사로잡고 있는가? 이처럼 위에 계신 대제사장을 묵상하는 것, 그가 모든 영광 가운데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심을 아는 것이야말로 거듭나서 새 생명을 얻은 자의 표지이다. 인격적인 측면이 점점 더 뚜렷해지는 것이야말로 새생명의 징표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나오면 어김없이 마음이 뜨거워져 엄청난 찬미와 예배와 경배의 말을 쏟아낸다. 사도는 성자와 사랑에 빠진 나머지 다른 것은 전부 잊어버린다. 사도 바울이 늘 하는 말은 내가 아는 일은 너희도 다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부활의 증인이자 사도였기에 특별히 경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밖의 모든 일은 개인의 능력이나 수용력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므로 우리 모두 누릴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변함없는 주장이다.

 

6) 이런 것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육신적인 생각은 이제 그만 버려야 한다. 세상에서는 타고난 재주와 재능과 지성 등이 큰 중요성과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교회 안에 들어오면 가치를 잃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장 큰 위험 요소로 작용한다. 교회 안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전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이요, 은혜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심으신 신성한 생명의 씨앗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씨 자체에 생명이 있다. 그러므로 씨가 있는 사람은 누구도 사도들처럼 될 수 있다. 사도들에게서 터져 나오는 예배와 경배의 외침과 체험이 그대로 반복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의 이름이 참으로 아름답게 들리는가? 예수 이름을 기계적으로 반복해서 부르냐고 묻는 것이 아니다. 그 이름이 너무 아름답게 들려서 할 말을 잃을 때가 있느냐는 것이다. 성자께서 우리를 위해 해주신 일일 뿐 아니라 그분 자신께 이런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그분을 찾고 있는가? 그에게서 만족을 얻고 있는가? 그에 대해 이런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 이런 체험을 하고 있는가?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은 어떤가? 그에게서 온전한 만족을 얻고 있는가? 평범한 그리스도인도 새 생명이 자라고 커지고 성숙할수록 예수를 아는 인격적인 지식을 열망하게 될 뿐 아니라, 그 고난에 참여하는 수준까지 예수를 실제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라고 말한다(3:16). 거듭난 자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정도까지 그와 연합된다. 사도는 골로새서 1장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운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리스도와 일치되면 그 고난까지 나누게 된다. 지금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알고자 하는 열망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가?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점점 더 많이 자랑하게 되는가?

 

7) 성부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1) 이것은 큰 신비이다.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과 각각 교통하는 일에 대해 증언해 왔다. 성부께 인격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성부의 존재와 속성에 대해 생각하길 좋아하는가? 하나님의 생각과 영광과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성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1:18),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인격적인 분이심을 안다. 성경의 인물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고, 그 앞에 가까이 나아갔다. 새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은 이런 일을 생각하고 묵상하길 좋아한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알고 싶어 한다. 하나님과 그의 무한한 속성에 대해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2)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오늘날 사람들은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지름길로 가길 원한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속성을 생각지 않는다. 축복과 체험과 활동에만 관심을 갖는다. 우리는 심각한 잘못된 길에 들어서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과연 영원하시고 영존하시는 하나님, 무궁히 계시는 하나님, 놀라운 이유로 세상을 창조하고 사람을 창조하여 동반자로 삼으신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길 좋아하고 있는가? 영광스러운 하나님과 그의 큰 목적에 대해 묵상하고 있는가?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일해 오신 하나님, 구속하신 하나님에 대해 묵상할 수 있다. 바울의 황홀경에 빠져 드는 모습을 보라. 그가 말하는 지혜는 이 세상이나 통치자들의 지혜가 아니라,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고전 2:7). 사도가 체험한 상태가 어떤 것인지 알겠는가? 우리는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에 대해 생각하는가?

 

[나아가며]


우리는 썩지 아니하시고, 보이지 아니하시고, 홀로 지혜로우신 하나님같은 위대한 찬송의 모든 단어와 구절들을 소중히 여겨 상고하고 묵상하며 노래함으로 영원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처럼 자신도 하나님을 자랑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즐겁게 주를 찬양하는가? 너무나 영광스러운 가사에 가슴이 뛰는가? 그 가사가 무슨 뜻인지 알고 거기 마음이 사로잡히는가? 이것이야말로 새 생명의 시금석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더 이상 차갑고 지적인 관념이 아니다. 나와 동떨어진 율법적인 신, 도덕에만 신경을 쓰는 신이 아니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다름 아닌 나의 하나님이시다.“ 성령으로 태어난 하나님의 생명이 영혼 안에 들어오면 이런 특징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가며 이에 대한 감격이 넘치고 이것이 우리의 삶에 적용될 수 있다면, 분명히 우리에게는 새생명이 점점 나타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가진 것이다. 이런 감격과 기쁨이 날이 갈수록 더욱 깊어지고 성숙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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